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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지키려고 애쓰지 마세요 - '지구를 지켜라!'를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3년 4월 18일 금요일 | 이해경 이메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구를 지켜라!>는 아마도 지구를 날려버린 최초의 영화로 기록될 것입니다. <아마겟돈>의 위기를 당해서도 끄떡없었고, <딥 임팩트>의 충격에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 남았던 지구가…… 수 차례에 걸친 외계인의 침공 또한 분연히 물리쳐왔고, 특히 7년 전 하늘을 뒤덮었던 외계인 군단의 무시무시한 공격마저 말이 안 될 정도로 간단히 물리치고 <인디펜던스 데이>를 선포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 자랑스런 우리의 지구를 폭파해버린 장본인은 놀랍게도,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 부실해서 언어 장애를 비롯한 갖가지 컴플렉스를 지니게 된 것으로 여겨지는, 그 억하심정을 풀어보겠다고 신성 모독을 불사하며 전쟁놀이에 광분하는 저 아메리카 합중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그 무지막지한 인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변방의 가련한 반도에서도 또 반쪽인 나라에서 배출된 신출내기 영화 감독이었던 것입니다. 단지 희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희망이 없다 해도 없는 것은 지구인이지, 지구한테야 무슨 죄가 있다고…… 묵묵히 돌고 돌며 제 소임을 다할 뿐인데……

한국 영화에 대해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일부러 피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좋게든 나쁘게든 할 말이 있는 우리 나라 영화를 최근에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제가 게으른 탓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적어도 요즘에 제가 본 몇 편의 한국 영화는 그랬습니다. 슬퍼해달라는 영화는 별로 슬프지 않았고, 웃어달라는 영화는 그저 웃겼습니다. 영화 스스로 웃기려고만 하지 않고 딴 짓을 하는 통에, 보는 저로서도 별 수 없이 웃다가 말았지만요. 그런 얘기는 재미없을 것 같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떠신가요? 저는 우리 영화를 한 수 접고 보게 되는 편입니다. 가재가 꼭
게 편인지는 확인된 바 없지만, 팔이 안으로 굽는 것만큼은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자막 안 봐도 되게 해주는 서비스가 어딥니까? 이따금 대사가 잘 안 들리는 것쯤은 제 귀를 탓해야 마땅하지요. 웬만한 허점은 눈감아주고 넘어갈 수 있는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이 저절로 준비된답니다. 한국 영화는 아무리 지루해도 졸지 않고 끝까지 보게 되는 걸요. 코스모폴리턴을 자처하는 제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저보다 심한 분들이 많던데요. 저는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한국 영화들을 놓치기가 일쑤거든요. <친구>도 비디오로 봤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켕길 것 없이 저는 그 영화가 좋지 않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주 부드럽게 말해 그렇지, 저는 그런 영화에 그렇게 많은 관객이 들었다는 사실 앞에서 아연, 서글퍼집니다. 그런가 하면 관객이 외면해서 화제가 되는 영화도 있잖아요. <친구>도 비디오로 본 제가 <고양이를 부탁해>를 영화관에 가서 봤겠습니까. 역시 비디오로 봤다는 핸디캡을 무릅쓰고, 저는 그 영화를 아마추어 영화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나쁘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다만 그런 영화에 많은 관객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넌센스가 아닌가, 상영 여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지구를 지켜라!>를 보기 전에는 영화를 보고 나서 할 말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저만 그런가 싶어서 인터넷에 접속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더니, 저만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뜨거운 호응 일변도이더군요. 흥행에 성공하고 있지는 못한 듯하지만, 영화를 본 분들은, 아니 영화를 보고 나서 할 말이 있는 관객들은 거의 다 네다섯 개의 별을 달아주고 있었습니다. 망하기엔 너무 아까운 영화…… 그리고 평론가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었구요. 감독이 신인다우면서 신인답지 않다…… 대단하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제가 주목한 것은 이 영화의 저조한 흥행에 대해 반성하는 마케팅 담당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코미디로 홍보한 것이 관객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 영화의 컬트적인 성격에 마케팅의 포커스를 뒀다면 그나마 누가 보러 왔겠느냐는 하소연이었는데요. 제가 보기에 그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처음부터 컬트가 되는 영화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이 영화에서 코미디는 분명히 중요한 포인트니까 거기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나마 적절한 홍보였습니다. 이 영화는 없는 게 없는 종합선물 세트다, 이런 식의 홍보에 끌릴 관객은 흔치 않겠지요.


<지구를 지켜라!>는 관객이 많이 들기 어려운 영화입니다. 이상하니까요. 이상한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상한 것에서 천재성을 발견하는 비범한 관객도 있겠지만, 이상한 것을 싫어하는 것도 역시 취향의 자유겠지요. 그러니까 이 영화에 시큰둥한 관객은 기대가 배반당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배반 뒤에 따라야 할 보상을 받지 못해 그러는 거라고 봅니다. 탓할 수 없어요. 제가 아무리 <친구>의 대박을 서글퍼 한다 해도, 그 영화에 몰려든 관객들을 욕한다면 멍청하다는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구를 지켜라!>가 철저히 이상했다면, 영화 자체에 대해 할 말이 많았을 겁니다. 제가 심심했던 건 이 영화가 자꾸 적당한 선에서 얼버무린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신하균의 발음이 듣기 좋게 명확했을 뿐 아니라 관객을 빨아들이는 힘이 느껴졌다는 것을 칭찬하고 싶구요. 몇몇 다른 영화들에 기댄 것도 그런대로 재미있었고, 그보다는 ‘신신 물파스’와 ‘이태리 타월’ 그리고 백윤식의 외계인 언어 등등이 상당히 웃겼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제 웬만한 한국 영화라면 능수능란하게 써먹는 감초 격에 불과하지요. 감독은 아마도 다르게 웃어주기를 기대했을 텐데요. 아픈 웃음이랄까, 엉뚱함 속의 상처를 봐 달라는 거였겠지요. 그런데 그 수법이 좀 안이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붙잡혀온 강사장이 어느 순간 갑자기 병구의 정체를 알겠다고 확신에 차 말하는 대목에서 저는 허술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뭐 외계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얕잡아 보기에 충분한 덜미가 아닐지요.


웃음과 아픔을 섞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냥 주인공의 과거가 이렇게 상처 투성이였다고 보여주는 걸로 얻을 수 있는 경지는 아닐 겁니다. 이 말은 소설을 쓰는 저 스스로에게 가하는 뼈아픈 일침이기도 합니다. <지구를 지켜라!>가 정말로 웃음을 통해 아프거나 아픔을 통해 웃게 하던가요? 저는 적당히 웃었고 별로 아프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아프다는 사실과 그 아픔이 느껴진다는 감정 사이에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 놓여있는 거라서…… 그래도 영화가 기발하지 않냐구요? 에이, 감독이 그 말을 듣고 좋아하겠습니까. 진짜 기발하고자 했으면 아픔이고 상처고 다 떨어내고 갔어야지요. 이 데뷔작의 미덕은, 가볍게 기발할 수도 있었던 유혹을 뿌리치고, 한껏 욕심을 부렸다는 데 있지 않나요? 그야말로 신인답지 않게 배짱 두둑한, 그래서 신인다운 패기 말입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흔치 않은……

정리하자면 저로서는 <지구를 지켜라!>가, 감독에게 다른 영화를 만들었어야 한다고 말하는 실례를 범할 만큼의 태작은 아니지만, 이 소중한 지구를 함부로 날려버려도 될 만큼의 공을 들인 영화 또한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그 정도라면 지구를 지켜야지요. 그 정도가 어떤 정도냐 하면, 아까 말한 한국 영화의 프리미엄을 적용해서 그런대로 넘어가며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물론 <고양이를 부탁해>와 같은 아마추어리즘은 아니구요. 노파심에서 다시 말씀드리면, 아마추어리즘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구요. 하지만 지구를 지키든 고양이를 부탁하든, 그게 사람들한테 잘 안 먹힌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이유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뭔가 가능성은 보이는 거 아닙니까? 조용히 다음 영화를 기다려주는 게,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을 향한 애정 표시로서는 가장 유효할 듯 싶습니다.

4 )
joe1017
지구를 지켜라...참 특이했던 영화   
2010-03-16 15:50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7
kpop20
보고싶었는데 ㅠㅠ   
2007-05-24 15:53
imgold
이해안되는 이상한 영화라고 기억되는데...
이 컬럼을 읽고 보니..다시 봐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고 보면..신하균..참 독특한 영화에 많이 출연했네요.   
2005-02-1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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