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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뭐시기한 거시기는?- ‘황산벌’을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3년 10월 27일 월요일 | 이해경 이메일

'황산벌'
'황산벌'
<황산벌>은 흔히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백제 사람들과 신라 사람들이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기발한 발상만을 놓고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 대해 기대가 컸던 저는 예고편을 보면서 좀 거시기했더랬습니다. 좋은 발상을 제대로 거시기하지 못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지요.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껄쩍지근하지요. 연개소문과 의자왕과 김춘추가 한 자리에 모여서 벌이는 그 희대의 설전. 그러다가 벌교 출신의 백제 병사들이 ‘신경전’의 반격으로 퍼부어대는 욕지거리 한 마당에 이르러서는, 웃다가 기절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황산벌>은 그냥 웃기고 마는 영화가 아닙니다. 뛰어난 코미디 영화가 다 그러하듯이, <황산벌>이 터뜨리는 웃음 뒤에는 가슴과 머리로 스며드는 짙은 페이소스가 깔려 있습니다. 웃다가 어느 순간 침묵하게 되지요. 이전투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혐오와 비난을 위해 쓰이는 말인데요. 황산벌 최후의 전투를 지켜보다 보면, 그 한자 성어를 새로운 느낌으로 떠올리게 됩니다. 개싸움하다가 개죽음 당할 때, 역시 불쌍한 건 개라는 깨우침이지요. 영화는 그 전에 이미 전쟁 놀이의 무서운 비극성을 예고합니다. 계백과 김유신이 장기를 두며 ‘심리전’을 벌이거든요. 두 장수가 말을 옮길 때마다 마당의 대형 장기판에서는 양쪽의 병사들이 하나 둘 죽어나가는 리얼한 게임이 펼쳐집니다. 그것이 참상인 이유는 다만 사람이 죽어서가 이니겠지요. 한 인간의 생사 여부가 그 자신의 의지나 판단과는 무관하게 결정되는 희한한 서바이벌 게임. 전쟁이 나쁜 이유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입니다.

'황산벌'의 정진영,박중훈
'황산벌'의 정진영,박중훈
그렇게 <황산벌>은 흘러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추는 데 그치는 영화가 아닙니다. 과거의 정확한 재현이란 언제나 환상이지요. 환상은 자유지만 그것이 유일하다는 선전은 언제나 사기입니다. 지나치면 폭력이구요. 그 옛날 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영화 속의 김유신도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기라. 그걸 아는 김유신의 신라는 살아남았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살아남았죠. 그렇다고 우리가 강한 자들의 역사를 맹목으로 신봉해서야 되겠습니까.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였다는 관창의 죽음을 화랑도 정신의 승리라고 칭송하고 마는 것은, 콩사탕을 싫어했다는 어느 철모르는 어린이를 반공의 화신이라며 죽어서도 편히 못 쉬게 괴롭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관창은 영화에서처럼 불쌍한 희생양이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최소한 그랬을 거라고 상상해 보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황산벌'
'황산벌'
그래서 <황산벌>은 ‘지금’의 ‘우리’를 뒤집어 털어 놓은 영화입니다. 신라군의 ‘뻐꾸기’들이 진중을 돌아다니며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 악성 유언비어를 퍼뜨리지요? 신라 왕 김춘추는 나당 연합군의 지휘 계통을 명시한 차트에서 서열 5위로 턱걸이하는 신세지요? 김유신은 그 차트에 명함도 못 내밀지요? 고구려는 중국 황제에게 밉보여서 ‘악의 축’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지요? 김유신은 신라 안에서도 출신 지역이 다른 부하 장수들에게 ‘우리가 남이가?’라며 결속을 당부하지요? 의자왕은 뇌물에 도가 튼 셋째 아들이 한심해서 모종의 액션을 취하지요? 적의 공격을 기다리는 성 안의 백제 결사대가,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 어느 고을의 청사를 사수하려다 죽어간 이들을 연상시킨다고 말하면, 저의 지나친 억측일까요? 배고픈 동료에게 자신의 주먹밥을 나눠주는 백제 병사 ‘거시기’의 따뜻한 마음, 그 거시기를 살아남게 하고 싶어 귀가를 명령하는 계백의 깊은 속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황산벌>은, 어느 지역 사투리를 쓰든, 혹은 어느 나라 말을 쓰든, 무릇 인간의 탈을 쓴 모든 이들에게 굵직한 메시지 하나 던지는 영화입니다.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웃거나 곰곰이 생각하기를 바라기는 힘들겠지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경구쯤은 어떤 언어로도 번역이 가능할 테니까요. 그 뜻을 새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막판에서 어떤 아낙네가 그 말을 비틀어 전달하는 진리에 가까운 메시지를 못 알아들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 내용까지 발설하는 것은 예비 관객들을 위해 도리가 아닐 테구요. 그 아낙네 역을 맡은 배우가 단 두 장면에 얼굴을 내밀고도 자신의 주가를 한껏 끌어올릴 만한 연기를 펼쳤다는 것만 귀띔해 드립니다. 그 배우, 감독에게 감사해야 마땅하지요. 저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입니다.

4 )
joe1017
이걸 왕의남자 이준익 감독이 찍었었다니...놀라울뿐...   
2010-03-16 16:02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3
qsay11tem
실망한 영화에요   
2007-11-27 14:04
imgold
실망실망 대실망... 박중훈은 뭣허러 이런영활 찍었다요. 정말 거시기 허요.   
2005-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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