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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랐는가. 골든라즈베리 VS 오스카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 정시우 기자 이메일


골든 라즈베리 VS 오스카

역사는 우연의 산물이라 했던가. 오늘날 안티 아카데미로 평가받은 골든라즈베리 시상식 역시, 산타모니카 틴셀타운이에 자리한 한 가정집 술자리에서 예기치 않게 시작됐다. 발단은 카피라이터 존 윌슨이란 자의 장난기다.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오스카 중계를 보던 존 윌슨은 술자리가 영 심심했는지, 그 자리에서 이벤트를 벌였다. “단돈 1달러도 아까운 영화를 뽑자”며 그네들만의 시상식을 연 것이다. 이때가 1981년 3월 31일.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골든라즈베리의 ‘라즈베리(Raspberry)’는 미국 속어로 조소할 때 내는 야유 소리, 비웃음, 혹평을 뜻한다. 한마디로 ‘대 놓고 면박 주기’ 상인 셈인데, 트로피 역시 조약하기 그지없다. 금박을 입힌 딸기송이를 8mm 빈 필름 통 위에 올려놓은 이 트로피의 제작비용은 4.27 달러, 우리 돈으로 5,000원 정도. 웃자고 만든 시상식에서 트로피마저 웃겨주고 있으니, 골든라즈베리는 결국 영화인들이 꺼리는 시상식으로 거듭나고 말았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상으로 평가받는 오스카도 시작은 조촐한 파티에서였다. 1929년 5월 16일. 영화제작자 더글러스 페어뱅크스는 영화의 예술적 측면과 기술 발전을 기리자는 취지로 영화인들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때도 나름 격조를 지켰으니, 가정집 술자리에서 시작된 라즈베리와 달리, 오스카는 미국의 강남이라 할 수 있는 할리우드 루스벨트 호텔에서 거행됐다. 십자군의 칼을 든 기사가 영화 릴 위에 서 있는 모양인 오스카 트로피의 사정도 라즈베리 보다는 낫다. 하지만 그렇다고 “금봤다” 수준은 결코 아니다. 유동적인 금값의 특성상 매해 가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현재는 대략 500달러, 우리 돈으로 58만원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스카 트로피의 가치가 단순히 500달러에 그친다고 생각하면 오산. 트로피를 손에 안는 배우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광고 제의와 덩달아 치솟는 영화 출연 개런티로 진정한 금빛 세계를 맛보게 되니 말이다.

<트랜스포머 2> VS <허트로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랐는가. 돈으로 바른 기술의 융단폭격보다, 작품성?

올해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 망신살을 톡톡히 본 영화는 <트랜스포머 2>다. 골든라즈베리 최다인 7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된 영화는 최악의 작품상·감독상·각본상을 안으며 3관왕의 수모를 겪었다. 매출 4억 달러로 지난해 미국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른 작품치고는 뒤끝이 영 개운치 않다. 그야말로 용두사미인 셈. 골든라즈베리측이 <트랜스포머 2>에 치욕스러운 굴욕을 안긴 이유는 많기도 많다. 지나치게 길다는 게 첫째요, 시끄럽다는 게 둘째요, ‘무감동’이라는 게 셋째인데, 여기에 라즈베리 재단은 “<트랜스포머 2>는 할리우드 현재의 잘못을 전형화한 작품”이라는 독설까지 퍼 부었다.

한편 ‘장미의 전쟁’으로 일컬어진 올해 오스카 최후의 승자는 <허트로커>다. <허트로커>의 캐서린 비글로우는 전 남편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를 제치고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각본·편집·음향편집·사운드믹싱 등 6개 부문을 석권했다. 특히 그녀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함으로써 82년 오스카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올해 <허트로커>의 선전에는 흥행보다 작품성을 중시하는 아카데미의 최근 트랜드가 한몫했다. 흥행 성적만 놓고 따진다면, 1,47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데 그친 <허트로커>는 북미에서만 7억 2,000만 달러를 긁어모은 <아바타>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오스카는 기술혁명을 선보인 <아바타> 대신, 이라크 전쟁의 트라우마를 심도있게 꼬집은 <허트로커>의 작품성에 손을 들었다. 한편 이 날 제임스 카메론과 비글로우는 바로 앞뒤로 나란히 자리함으로써 두 사람을 사진기 안에 담으려 애쓰는 파파라치들을 배려했다. 비글로우의 감독상이 호명되는 순간, 가장 기뻐한 것도 전 남편 카메론으니, ‘참말로’ 시크하다, 이들의 관계!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오스카 수상감이 아니었을지.

산드라 블록 VS 산드라 블록
무엇이 산드라 블록의 운명을 갈랐나. 작품선택?

올해는 여성에게 처음으로 오스카 감독상이 돌아갔다는 것 외에, 한 배우가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골든라즈베리 최악의 여배우상을 동시에 석권했다는 것에서도 큰 이슈를 낳았다. 주인공은 산드라 블록으로 <올 어바웃 스티브>로 최악의 여배우상을 수상한 산드라 블록은 바로 다음날 <블라인드 사이드>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놀라운 건, 수상자 대부분이 불참하는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 낄낄거리며 나타나는 대범함을 보인 것. 블록은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올 어바웃 스티브> DVD를 참가자들에게 직접 나눠주며 “내년에 다시 와서 이 상을 돌려주겠다. 여러분들 모두 집에 가서 내가 정말 최악의 연기를 했는지 봐 주기를 바란다”는 ‘조크’로 할리우드의 맏언니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최악의 여배우와 최고의 여배우를 동시에 거머쥔 경우는 산드라 블록이 처음은 아니다. 2002년 <몬스터볼>로 흑인 배우 최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할 베리는 2년 뒤 <캣 우먼>으로 골든라즈베리의 부름을 받은바 있다. 할 베리 역시 시상식에 참석하는 ‘용자’다운 모습을 보였는데, “오 맙소사, 내 생애 한 번도 이 상을 탈 줄 몰랐지만 어쨌든 고마워요”라며 라즈베리 역사에 길이 남을 수상소감을 남겼다. 굴욕도 즐길 줄 아는 할 베리와 산드라 블록의 여유는 오스카 트로피 보다 더 반짝였다.

조나스 브라더스 VS 제프 브리지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랐는가. 심사위원 나이?

조나스 브라더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여기서 원더걸스가 떠오른다면, 당신은 해외 활동 중인 원더걸스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그녀들의 팬일 가능성이 높다. 조나스 브라더스는 미국으로 건너간 원더걸스에게 자신들의 콘서트 오프닝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준 미국 인기 아이돌 그룹이다. 케빈, 조, 닉 3형제로 구성된 이들은 북미 전국 투어 실황을 3D 디지털 입체화면으로 담아낸 디즈니사의 콘서트 다큐멘터리 <조나스 브라더스-3D 콘서트 경험>으로 굴욕은 안았다. 골든라즈베리가 아이돌 가수들에게 훈계를 하고 있을 때, 오스카는 한물 간 컨트리 가수를 멋지게 소화해 해 낸 <크레이지 하트>의 제프 브리지스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음악영화에 출연한 가수와 배우에게 최고와 최악의 연기상이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할리우드표 뽕짝(컨트리 뮤직)’의 승리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궁금해지는 건, 심사위원들의 나이다. 혹시 댄스보다 뽕짝을 좋아하는 어르신들이 심사에 대거 참여한 게, 이들을 운명을 가른 게 아닐런지. 심사위원을 10대들로 구성했더라면, 이들의 운명은 분명 뒤집어졌을 게다. 조나스의 팬들이 자신의 우상이 최악의 상을 받는 걸, 팔짱끼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빌리 레이 사이러스 VS 크리스토프 월츠
무엇이 그들의 운명을 갈랐는가. 가십과 신비주의?

우리나라 팬들에게는 ‘듣보잡’일 가능성이 크지만 빌리 레이 사이러스는 미국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컨트리 가수다. 또한 최근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하다는 틴에이저 마일리 사이러스의 아빠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컨트리 가수인 그를 골든 라즈베리가 불러들인 건, 디즈니 채널의 청소년용 TV시리즈를 극장용으로 각색한 영화 <한나 몬타나: 더 무비> 때문이다. 딸 마일리 사이러스와 함께 출연한 영화로 팔자에도 없는 최악의 남우조연상 폭격을 맞은 셈. 라즈베리 재단이 그에게 이 상을 안긴 건, “연기 좀 제대로 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최근 누드 사진 유출 파문, 친구의 애인 가로채기, 자신을 키워 준 디즈니사에 대한 배신 등으로 린제이 로한의 뒤를 잇는 할리우드의 말썽녀로 떠오를 위기에 놓인 “딸 관리 좀 잘 하라!”는 의미의 상이지 않을까도 싶다.

아, 정말이지 이 분이 받을 줄 알았다!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을 본 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거다. 유태인을 사냥하는 독일 나치 장교 한스를 연기한 크리스토프 왈츠의 소름을 넘어 가시가 돋치는 연기를. 작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후, 올해 골든글로브, 미국 배우조합상을 연달아 수상한 그는 오스카 트로피까지 추가하며 ‘브래드 피트를 보러 갔다가, 왈츠에게 반해 돌아왔다’는 소문이 괜한 게 아님을 증명했다. 주목할 건, 그가 오스트리아에서는 지명도가 있는 배우지만, 세계 시장에서 그야말로 백지에 가까운 배우였다는 사실. 빌리 레이 사이러스가 시시콜콜한 가십을 등에 업고 골든라즈베리에 입성한 것과 비교하면, 가십은 물론 나이조차도 제대로 알려진 게 없었던 크리스토퍼 왈츠의 신비주의 이미지는 캐릭터에 대한 몰입감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아, 물론 그에게 린제이 로한보다 더한 망나니 딸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스카가 그의 명연기를 외면하지는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시에나 밀러 VS 모니크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갈랐는가. 편견을 이겨내는 힘?

지난해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 홍보차 한국을 방문, 뵨사마 이병헌에게 날린 기습 뽀뽀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시에나 밀러는 이번 골든라즈베리에서 발연기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안타까운 건 그녀의 수상을 당연시 여기는 시각이다. 사실 그녀는 흥행영화보다 작가주의 영화들에 관심을 가져 온 배우다. 다만 주드 로의 옛 애인이라는 점과 패셔너블한 의상,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연기에 대한 재능이 가려졌을 뿐. 이번 수상 역시 시에나 밀러의 외모에 전착한 결과가 낳은 비극이다. 그녀를 금발의 백치미 넘치는 캐릭터로 만들어버린 초딩스러운 시나리오와 연출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발연기에 머물고 만 건, 명백히 그녀의 잘못이지만. 그나저나 이보다 더 한 굴욕은 시에나 밀러가 왜 ‘주연’부분이 아닌, ‘조연’부분에서 상을 받았는가에 있다.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에서 시에나 밀러, 주연 아니었어? 골든 라즈베리가 사람 두 번 죽이는구나!

오스카 여우조연상은 부모로부터 학대받고 불우하게 성장한 흑인 비만 소녀 이야기를 다룬 <프레셔스>에서 주인공 소녀의 어머니를 연기한 모니크에게 돌아갔다. 모니크의 수상이 주목 받은 건, 그녀가 흑인이라는 점 때문이다.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유모 역을 맡은 해티 맥대니얼이 인종주의의 편견을 넘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후, 오스카는 <사랑과 영혼>(1991)의 우피 골드버그, <몬스터 볼>(2001)의 할리 베리, <드림걸즈>(2006)의 제니퍼 허드슨 등 단 네 명에게만 트로피를 허락해 왔다. 그러니까 이번 모니크의 수상은 이 땅위의 흑인 여배우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트로피라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모니크의 수상이 시에나 밀러와 비교되는 건, 시에나 밀러가 외모적 편견에 갇혀 허덕인 것과 달리, 그녀는 흑인이라는 편견을 보기 좋게 넘어섰다는 점이다. 운명은 결국 스스로 개척하는 자의 것임을 모니크는 온 몸으로 증명했다.

편의상 골든라즈베리와 오스카는 ‘최악’과 ‘최고’라는 이분법으로 나뉘어 불리고 있지만, 사실 이들의 차이는 단순히 두 단어로 구분될 만큼 단순한 게 아니다. <올 어바웃 스티브>에서 정신 못 차리고 헤맸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로 멋들어지게 부활한 산드라 블록의 예에서 보듯, 비평가들에게는 뭇매를 맞았지만 관객들에게는 많은 사랑을 받은 <트랜스포머 2>가 증명하듯, 최악의 주연상을 수상하고도 여전히 소녀 팬들에게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는 조나스 브라더스가 말해주듯 오스카의 수상이 그 배우의 앞날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고, 골든라즈베리에서의 수상이 그 배우의 이력에 치명적인 약점을 남기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이후다. 모니크가 증명했듯 운명이라는 건, 갈리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니 말이다.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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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봤습니다   
2010-03-1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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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역시 만들어가는 것이 세상사는 이치 중 하나인가봅니다   
2010-03-17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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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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