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
“이 영화를 마치고 개봉하고, 인터뷰하는 지금 이 순간 미련이 없어요. 하고 싶은 거 다 해봤으니, ‘내일 죽어도 호상이다’ 싶은 느낌입니다” 류승완 감독은 <휴민트>를 두고 자신의 연출 인생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될 작품이라 말한다. 20년 넘게 액션이라는 장르의 최전선에서 관객과 호흡해 온 그가 이번에 집중한 것은 기교보다는 사람 사이의 ‘도리와 염치’였다. 제목인 <휴민트(HUMINT)>는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활동을 뜻하지만, 류 감독은 이 제목 아래 자기 집이 아닌 곳에서 깨어나고 잠드는 ‘조 과장’(조인성)을 비추며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촘촘한 관계망 안에서 결국 혼자 있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렸다는 것. “온전히 사람한테 집중해 보자, 그러면 오히려 새롭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임했다는 류승완 감독을 만났다.
◆ 분노에서 출발하여 조심스러움으로 완성한 서사
이 영화의 뿌리는 <베를린>(2013) 취재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한 인신매매 사건은 당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 만큼 참혹했다. 류 감독은 “사람을 사고파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때 너무 화가 났고, 그 분노가 시발점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 분노를 바탕으로 ‘범죄를 응징하는 자, 범죄의 파도에 휩쓸린 희생자, 그리고 과거의 실수를 현재에 속죄하고 싶은 사람’의 구도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제작비가 큰 대중 영화임에도 류 감독은 요란하게 끼를 부리는 방식 대신 ‘집중의 침묵’을 택했다. “극장 안에서 100명 이상의 관객이 숨을 죽이고 볼 수 있을 만한 서스펜스, 다시 말해 지루한 침묵이 아닌 집중의 침묵”을 구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재가 가진 무게만큼 연출적 고민도 깊었다. “소재에서 오는 화와 불편함이 없을 순 없겠지만, 카메라의 시선이 대상을 착취하거나 구경거리로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밝혔다.
특히 불호 포인트로 언급된 ‘유리관 총격전’에 대해서는 “실제로 들은 증언이었고, 영화 속에서라도 그들을 단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관객의 불호 반응을 보며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더 세심하게 짚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겸허하게 답했다. 한편, 여성 캐릭터인 ‘채선화’(신세경)가 극 중에서 보여준 주체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시선에 대해 류 감독은 제작 초기부터 확고한 기준이 있었음을 밝혔다. “아내도 있고 딸도 있다 보니, 여성을 다룰 때 이미 가정에서 검열을 거치게 된다(웃음). 채선화는 <휴민트>라는 제목 자체를 대변하는 인물이라, 액션 속에서 단순히 소비되는 대상에 머물면 극의 동력 자체가 상실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인물에 대한 존중은 비단 주연뿐 아니라 극 중 스쳐 지나가는 조·단역들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었다. 류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인물을 번호로 매기지 말자고 다짐했다. “북한 영사관 직원 1, 2, 3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름을 부여했다. 스태프들이 누가 누구인지 헷갈려 할 정도로 모든 인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지만, 소모적으로 다루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이었다” 어떤 캐릭터든 단 한 순간이라도, “현실에서 자기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의 매력을 지녀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평소 인물을 도구화하지 않는 류승완식 연출의 근간을 보여준다.
|
◆ 마침내 추앙했던 홍콩 누아르를!
공간의 구현 역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실제 블라디보스토크 대신 라트비아에서 촬영하며 환율 문제 등으로 애를 먹기도 했다. 류 감독은 “스펙터클을 강조하기보다 인물의 세세한 감정선을 살리고 싶어 길거리의 요란한 보조 출연도 다 뺐다”며, <베를린>을 촬영했던 리가라는 도시의 건축물과 도로 모양 하나하나를 다시 살폈다고 전했다.
액션 디자인에는 <모가디슈>(2021) 때부터 함께한 군사 자문팀과 국정원 출신 교관의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 실제 교전 사례를 바탕으로 디자인된 총격전은 류 감독이 오랫동안 추앙해온 홍콩 누아르의 비장미를 그만의 방식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다. “내가 유일하게 구현하지 못한 장르가 홍콩 영화였는데, 이번에 찍으면서 ‘드디어 이걸 찍는구나!’ 싶어 정말 좋았다”는 그의 말에서, 오랫동안 동경해온 영화적 세계를 마침내 자신의 스크린 위에 펼쳐낸 창작자의 순수한 환희가 읽힌다.
◆ 조인성을 필두로 한 든든한 배우들
배우들의 매력을 포착하는 방식에서도 류 감독의 세밀한 시선이 돋보인다. 조인성에 대해서는 “인성이 좋다고 매일 놀리는데 진짜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참 품위 있게 변해가고 있다. 조 과장은 실제 조인성과 닮았다. 혼자 살고, 일만 하고, 일이 안 풀리는 경우에 괴로워하는 등 조 과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전했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조 과장의 표정은 류 감독이 “어떻게 하면 이 배우를 가지고 처음과 끝을 장식할까” 고심하며 담아낸 결과다.
박정민에 대해서는 “엄청난 체중 감량을 하고 와서 스태프들을 놀라게 했다. 준비가 철저한 배우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이번 현장에서 박정민은 “예전의 막내 같던 모습에서 벗어나 형처럼 조·단역배우들을 챙기는 모습이 참 고마웠다. 원래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에 챙기는 걸 보면서 많이 성장했구나 싶었다”고 덧붙였다.
관객들이 <휴민트>에 녹아든 관계의 정서를 멜로처럼 읽어낸 지점에 대해서는 “박정민 배우도 그렇고 나도 이 영화를 멜로로 인식하실 줄 몰랐다”면서 “연출 20년 동안 키스신 한 번 안 찍어봐서 동료 감독에게 어떻게 찍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고 가볍게 언급했다. “과거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 밀도를 관객들이 잘 봐주신 것 같다”며 웃었다.
조인성과 박정민 외에도 함께한 배우들에 대한 신뢰는 두터웠다. “박해준 배우는 중년의 나이임에도 폼잡는 게 일절 없다. 총격전을 찍을 때 그 무거운 가죽코트를 입고 반동을 견디는 게 굉장히 힘든 데도 전혀 스트레스 없이 허허하고 넘기더라. 본받고 싶은 배우다.” 또한 <모가디슈>에 이어 함께한 박명신 배우에 대해서도 “현장의 왕고참이자 스승 같은 분임에도 권위의식이 전혀 없어 현장이 무척 화목했다”며 감사를 표했다.
|
◆ 분기점에 선 류승완, 다시 서도철의 시간으로
인터뷰 당시 류 감독은 설 연휴 무대인사를 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작년 설과 비교해 극장에 활력이 도는 체감이 들어 너무 감사하다. 장항준 감독이 잘 돼서 너무 좋고, 유해진 선배 현장에 커피차도 보내며 응원했다”며 동료들에 대한 따뜻한 응원을 전했다.
그는 <휴민트>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 말한다. “개봉 후 인터뷰를 하는 지금, 참 홀가분하고 미련이 없다. 하고 싶은 걸 다 해봤기에 ‘내일 죽어도 호상’이라는 기분이 들 정도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물론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반응들은 앞으로 더 고민해야 할 숙제”라며 관객의 목소리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도 잊지 않았다.
이어 그는 “분명한 건 휴민트가 나에게 큰 분기점이 되리라는 사실이다. 지난 20년 동안 다양한 시도를 해왔고 이번에 하고 싶은 것을 다 쏟아부었으니, 이후 내 영화는 이전과는 또 다른 결이 될 수도 있겠다”는 고백으로 진심 어린 여운을 남겼다.
류 감독은 이제 차기작 <베테랑 3>로 향한다. “2편이 1편에 대한 부채감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면, 3편은 관객이 좋아한 서도철을 다시 귀환시켜 돌려드리겠다는 생각이다.” <휴민트>라는 뜨거운 분기점을 통과한 류승완이 다시 그려낼 서도철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류 감독의 다음 스텝을 기대해 본다.
사진제공. NEW
2026년 2월 27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