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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여~!'를 외치지 않는 민주화 운동 영화 <1991, 봄> 권경원 감독
2018년 11월 2일 금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은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시민과 학생이 바라던 민주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1, 봄>은 다시금 유사 군부독재로 일컬어지는 노태우 정권이 등장한 바로 그 시절, 1991년 봄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공안 검사에 의해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의 장본으로 지목됐던 강기훈은 물론,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사망한 이들과 그런 시대에 절망해 분신으로 생을 마감한 이들의 사례를 소상히 기록한다.

그러면서도, 권경원 감독은 흔히들 사람들이 떠올리는 ‘운동권 영화’ 특유의 과잉 정서만큼은 탈피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열사여~!"를 외치는 선배 세대의 격렬한 구호에 자신 역시 그다지 고양되지 않았기에 대안을 찾으려 애썼다. 강기훈이 직접 연주한 기타곡으로 이야기의 기점을 나눴고, 인형극 형식의 애니메이션 효과를 도입했다. 본 내용에는 관계자 인터뷰와 각종 영상 및 기사 자료를 꾹꾹 눌러 담았다. 새로운 세대가 그 시절을 바라봐주기를 간곡하게 바랐기에, 오히려 사건에서 한 발자국 물러선 듯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현하고 싶었다.


<넘버3>(1997)의 제작부로 일했고, <친절한 금자씨>(2005)의 프로덕션 수퍼바이저 경력을 보유했다. 상업영화에 몸담던 당신이 긴 공백기 이후 1991년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돌아왔다. 왜 이 이야기를 만들었는가.
1991년을 배경으로 한 극영화를 기획 중이었다. 유서 대필 사건을 조작하는 검사를 바라보는 베테랑 수사관과 그 수사관의 딸이 주인공인 코미디물이었다. 그런데 자료조사를 할수록 그 사건의 핵심에 있는 강기훈이라는 사람이 마음에 걸리더라. 아무래도 내 마음속에 강기훈이라는 사람과 1991년에 대한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었던 것 같다.

홍보 일각에서는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 바로 다음에 <1991, 봄>이 있다고 말한다.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뤄낼 것 같았던 우리 사회가 전두환 정권의 연장과 다름없는 노태우 정권을 맞게 됐고, 당신의 영화는 바로 그 시점에 벌어진 ‘분신 정국’을 다룬다.
그 시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일종의 감정적인 원형을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미안함, 죄책감, 패배감 같은 것들이다. 나와 비슷한 세대인 김연수 작가나 김별아 작가가 작품 속에서 늘 외롭고 쓸쓸한 정서를 드러내는 것도 비슷한 이유 아닐까. 그 시절 기억에 대한 치유든, 위로든, 반전이든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그러질 못했다.


당신도 1991년을 경험했다고 봐야겠다.
물론이다. 명지대생 강경대가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던 날 나 역시 전경에게 린치를 당하고 있었다. 대성리로 MT 답사를 하러 가려는데 내가 타고 있던 택시를 세우더니 “어제 그 시위 장소에 있지 않았느냐"는 명목으로 마구 때리더라. 사실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대학교 주변에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이 넘실대던 때다. 그저 어디서 최루탄이 좀 터졌네 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아는 선배가 다치고, 실명하고, 죽는 상황이 일상적으로 반복됐다.

학생 운동하면 흔히들 1987년 6월 항쟁을 끌어낸 80년대 학번들을 떠올리기 쉽다. 반면 90년대는 정치적 격동보다는 대중문화적 격동으로 기억되는 측면이 크다.
맞는 말이다. 1992년에 서태지가 ‘난 알아요’로 데뷔했고 1993년 이소라가 ‘낯선사람들’이라는 앨범으로 처음 등장했다. 나 역시 대중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그 시기에 남들과 같은 마음으로 그것들을 향유했다. 심지어 이소라 공연장을 쫓아다녔을 정도다. 유재석, 박진영은 나와 동갑이다.(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996년 국가보안법으로 위반으로 구속됐다.

서태지와 이소라의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에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이라…
그러니 90년대에도 당연히 학생운동이라는 게 있었지 않겠는가. 80년대만큼 치열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운동이라는 것이 마치 정당 체제처럼 제도화, 관료화되어있었기 때문에 당시 운동권들은 늘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선배들은 우리 세대를 ‘X세대’나 ‘오렌지족’이라고 부르길 좋아했지만, 그런 규정은 우리 세대의 특징을 뭉뚱그리는 행위였을 뿐이다.

본격적인 영화 촬영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
한 시민모임에서 1991년 당시 정국과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제작하고 싶어 했고, 그게 이 영화의 시작이다. 그때 강기훈 선배가 자기 기타연주회를 찍어간 놈이 하나 있다며 나를 언급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거의 미필적 고의 아닌가.(웃음) 2013년, 실제로 강기훈 선배가 첫 기타 연주회를 열었고 내가 그 연주회를 촬영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강기훈이 직접 연주한 기타곡으로 영화의 챕터를 나눈 점은 꽤 독특하다.
젊은 세대가 이 영화를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새 세대가 이 이야기를 다시금 발견해 주길 바랐다. 1991년의 그 사건이든, 거기에 있던 사람이든 말이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감수성을 강요하거나, 눈물을 짜내려는 방식을 최대한 경계했다. ‘열사’ 같은 단어도 전부 빼버렸다. "열사여~!"같은 장황하고 과장된 외침에는 나 역시 더이상 고양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주인공들이 당시 어떤 말을 했고, 어떻게 웃었으며,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음악으로 챕터를 나눈 점이나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한 점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젊은 세대와의 교감 면에서는 분명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극장에 걸리는 작품의 초반 흥행을 좌우할 정도로 빠른 반응을 보이는 젊은 세대는 대개 민주화 이후에 태어났다. 그들에게 1991년 시절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의 소구력을 갖는다고 보는가.
그게 참 한스러운 부분이다. 그래도 이 영화가 제작됐다는 소식을 듣고 성균관대 13학번 학생들이 단체관람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이건데!' 하면서 정말 감탄했다. 정작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우리 세대는 이미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해서인지, 이렇다 할 도움을 주거나 응원해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들에게서 아직도 저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느냐는 듯한 시선을 느낀 적도 있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실은 더 모를 수도 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소속이던 당시 관련자 십 수명을 인터뷰하고, 강기훈에게 유죄 선고를 내린 법조인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도 한다. ‘기록’에도 상당히 충실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사료적 가치다. 언급한 장면뿐만 아니라 귀한 자료가 많다. 강기훈이 눈물 흘리는 장면은 지금껏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데, 다행히도 원본 자료를 가지고 있는 MBC에서 그 장면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SBS는 유서 대필 조작사건을 다뤘다가 과거 불방되고 말았던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 영상 자료를 흔쾌히 내줬다. 당시 PD가 고 김기설 역을 대신 연기하는 장면도 포함돼 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도 여러모로 도움을 줬다. 그런데 유일하게 동아일보는…(웃음) 노태우 전 대통령 당시 선포된 ‘범죄와의 전쟁’을 다룬 한글 기사 제목을 영화에 쓰고 싶다는 내 요청을 거부했다.


흠.(웃음) 이 영화를 얼마만큼의 사람이 봐줬으면 좋겠는가.
약 1,300명의 후원자가 영화 제작비를 마련하는 스토리 펀딩 프로젝트 '강기훈 말고 강기타'에 참여해 주셨다. 정식 개봉 전 상영회에도 딱 그만큼의 분들이 찾아주셨다. 열심히 홍보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지인들의 응원이 전부다. 욕심 같아서는 영화 <1987>을 보신 관객의 1/100만이라도 <1991, 봄>을 찾아주셨으면 좋겠다. 그게 6만 7천 명쯤 된다. 그러면 배급사도 빚을 안 지고, 제작비 적자도 상쇄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강기훈 선배에게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긴 공백 후에 새 작품을 선보였다.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지도 궁금하다.
밥벌이 때문에 한동안 영화판을 떠나있었지만, 여전히 조선소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최대한 창작의 자유를 존중받고 싶지만 큰 자본과 협업할 생각도 있다.(웃음) 80살이 될 때까지 뭐가 됐든 원하는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그때까지 잘 버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늘 최악의 상황을 막아내는 골키퍼의 심정이다. 어째서 스트라이커가 아닌 걸까.(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아내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결혼하던 해부터 강기훈 선배를 쫓아 다니고 영화 준비를 하는 바람에 신혼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물론 아내를 만난 이후로 책도 좀 덜 읽고 음악도 잘 안 듣게 된 것 같긴 하지만…(웃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이 앉아 수다를 떠는 게 참 좋다.

2018년 11월 2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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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인디플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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