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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진리 <엑시트> 이상근 감독
2019년 7월 29일 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길거리에 퍼진 유독가스가 공중으로 차오르는 재난 상황, 좋은 직장에서 돈 많이 버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용남’(조정석)은 ‘의주’(임윤아)와 함께 과거 산악동호회에서 배워둔 암벽타기 기술로 건물과 간판을 타고 오르며 위기에 빠진 가족을 구한다. 아무런 쓸모 짝에도 없다고 타박받던 실력이 엄청나게 쓸모 많은 능력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제 밥벌이 못 하던 장기 취준생 아들의 뜬금없는(?) 맹활약에 가족들은 모두 ‘띠용’한 상태. 웃음과 스펙터클이 높은 비중으로 배합된 <엑시트>는 결국 사랑의 씨앗이 몽실몽실 움트는 마지막을 맞는다.

이건 물론 영화적인 이야기다. 변변치 않은 인생이 갑자기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일은 현실에서는 흔치 않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건가? 뭐라도 해놔야 뭐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미래에 써먹을 수단을 한방이라도 장전해 두는 게 아닐까? 그게 동네 놀이터 철봉 타기로 암벽타기의 끈을 놓지 않은 ‘용남’의 끈기이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일터 서랍 한편에 산악용 고리를 보관해둔 ‘의주’의 의지이든 말이다. ‘뭐가 될지 모르지만 뭐라도 해보자’는 건 인간으로 태어난 모두의 소관이자 숙명이다. 이상근 감독은 그게 “천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진리”라고 말한다.


<엑시트>를 두고 새로운 한국형 재난 물이라는 평가가 많다. 공포, 신파의 자리를 가족 정서에 기반한 웃음으로 대체했다. 암벽타기, 줄타기, 전력 질주 등 배우의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확실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것도 특징적이다.
재난 영화라고 해서 어둡게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워낙 웃음이 발생하는 상황을 좋아한다. 단편 작업에서도 그런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영화 초반 ‘용남’이 어떤 상황에 놓인 인물인지 알려주지 않나. 그러다가 재난 상황에서 뜻밖의 행동을 보여줄 때 가족이 어떻게 반응하지를 보여주면서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너무 웃음에 치중하면 재난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을 저해할 수도 있어서 어떻게 하면 억지스럽지 않게 장르와 웃음의 균형을 맞출지 생각했다.

배우가 몸을 제대로 쓰는 작품이다. 벽과 간판, 줄까지 타고 어느 시점부터는 전력으로 달리며 쾌감을 높인다. 작품의 이런 특성을 잘 납득하고 소화할 역량이 있는 배우를 선호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게 캐스팅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위험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대역을 최소화한 촬영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석은 워낙 몸을 잘 쓰는 배우라는 칭찬을 많이 들었던 차다. 촬영 몇 달 전부터 암벽장 훈련을 시작하더라. 극 중 철봉을 타는 장면은 식단 조절을 거쳐 직접 연기한 장면이다. 그 정도로 철봉을 타는 건 쉽지 않다. 보는 나도 정말 놀랐다.


그가 건물의 울퉁불퉁한 벽면이나 튀어나온 간판을 부여잡고 공중으로 올라갈수록 진부하게만 느꼈던 도시적 풍경이 일종의 스펙타클로 기능하는 느낌이었다.
<엑시트>는 건물이 또 다른 주인공인 영화다. 벽면의 형태와 요철이 주인공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위험이 되기도 한다. 이런 공간에서 어떤 액션을 취해야 가짜처럼 보이지 않고 관객을 수긍하게 할까 무술 감독과 많은 상의를 했다. 종종 공해 수준으로 간판이 많이 달린 경우를 보는데, 그런 모습을 활용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지만 눈여겨 보기 시작하면 생경할 만한 모습이 무엇일지 미술감독과 여러 번 이야기했다. 꽃게, 사자, 낙지 같은 조형물 간판을 쓰면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도 극의 중요한 오브제가 될 것 같았다.

‘의주’역의 임윤아는 <공조>(2016)에서 보여준 푼수 같은 매력을 이어가는 느낌이다. 조정석만큼 벽을 타지는 않지만 다양한 맨손 움직임과 전력 질주로 몸을 쓰는 데 큰 비중을 둔다. 자신이 잘 소화할 수 있는 옷을 입었다고 본다.
캐스팅에는 <공조>의 역할이 컸다. TV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서 보여준 인간적이고 털털한 모습도 색달랐다. 관성에 따라 역할을 조합할 수도 있었지만, 모험이 되더라도 신선한 매력을 쫓아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의주’역은 달리는 모습이 중요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 트레이닝을 거쳐 많은 무대 공연을 한 윤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저 ‘콤파스’로 잘 달리면 얼마나 멋있을까 생각했다.(웃음)

촬영 당사자들에게는 신체적으로 매우 고된 영화였을 듯싶은데...
누구나 본인 체력에 한계가 있다. 임윤아의 경우 촬영 현장에서 자기 근력을 다 소진해 일어설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특수 효과와 카메라 움직임을 고려해야 해서 달리는 장면을 한 번 더 촬영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분했던 것 같다. 딱 한 번 눈물을 보였다. 나는… 불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웃음) 감독으로서 배우를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힘들어하는 배우에게 같은 장면을 다시 한번 연기하게 하는 게 감독의 숙명이겠지.(웃음)
감독과 배우는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대화인데, 촬영 현장에서 이런저런 의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 결국 작업 초반에 이야기해 놓은 것들을 토대로 감독도 배우도 각자의 생각과 해석대로 표현해 나가는 거다. 다행히도 <엑시트>에서는 배우와 소통이 잘 이루어졌다. 그들 덕분에 내가 골라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영상을 얻어낼 수 있었다.


<엑시트>는 재난 영화지만 큰 틀은 가족 드라마라고 봐야 한다. 전통적인 대가족의 모습 보여주면서도 시대착오적인 설정이나 억지스러운 감동 없이 가벼운 웃음과 따뜻한 정서로 일관한다.
원래는 결혼하는 전 애인을 습격하는 청년들의 소동극을 연출하려고 했다. 결혼식을 방해하려던 이들과 결혼 당사자들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며 재난에 대처하는 상황이었다. 지금과는 유머 발생 포인트가 완전히 달랐다.

제작사 외유내강과의 상의 후 지금 같은 설정으로 변경했다고 들었다. 작품 색을 잘 살리는 데 그쪽이 더 적절할 것 같다는 판단이었나.
한 세대에 국한된 이야기보다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을 다룰 때 이야기가 풍부해질 것 같았다. 내가 대가족 분위기에서 자라서 오지랖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한국적인 상황을 잘 알기도 한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내 꿈 때문에 주변 ‘오지라퍼’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들었다. 분명 애정이 어린 말인데 약간 피곤한 것 같은…(웃음) 그런 상황을 풀어내면 충분히 재미있겠다 싶었다.

극 중 ‘용남’이 딱 그런 상황이다. 취업과 결혼 소식을 물으려는 친척 어른에게 질문할 틈새를 주지 않고 미리 다 이야기해 웃음을 주더라.(웃음) 일종의 경험담인가.
난 그런 질문을 받아도 허허실실 웃어넘기는 편이었다. (때가 되면) 다 돼요~ 같은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몇 년이 지나니까 그들도 아예 그런 질문 자체를 안 하더라. 오지랖도 한계치를 넘어선 거다.(웃음)


<감상과 이해, 청산별곡>(2004) <베이베를 원하세요?>(2006) <명환이 셀카>(2007) <간만에 나온 종각이>(2010)까지 줄곧 단편 영화를 연출했다. 첫 장편 상업영화에 평단의 반응이 우호적이니 집안에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만하겠다.
집에 뭔가를 말할 수 있다는 게 좋다. 나 뭔가 하고 있어요, 놀고 있진 않았어요…! 같은 것.(웃음) 집안에서의 위치가 소박하게 변경되고 있는 것 같다.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도 중요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중요하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단편영화제에서 받은 상을 ‘스윽’ 내밀고, 그 약발이 떨어질 때쯤 다시 어디서 지원금을 받아오는 내가 꿈의 기한을 계속 연장하고만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두 분이 나를 앞에 두고 싸우신 적도 있다. 의사나 시키지, 왜 그 과를 보내서…(웃음)

(웃음) 어찌 됐든 뭔가를 위해 뛰어보라는 영화의 메시지가 감독 당신과 닮았다는 생각이다.
너무 뻔하고 착하기만 한 말일 수 있다. 힘내. 한번 해봐. 잘 될 거야. ‘용남'은 그런 말이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유행처럼 소비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본 누군가는 내게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거보단 그래도 뭐든 해보는 게 낫다. 생존을 위해서든 꿈을 위해서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아무것도 안 하고 뭔가를 얻을 순 없다. 천년 뒤 미래가 와도 그게 진리 아닐까.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두 시간 전쯤 인터뷰를 위해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 입꼬리가 씰룩쌜룩 하더라. 친척들이 보내준 영화 기사를 보신 것 같다. 내가 “웃으려면 그냥 웃어” 하니까 그제야 활짝 웃으시더라. 한국 가족 정서상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최고다” 같은 말씀이야 안 하시지만 옆집 아줌마한테 “우리 아들 영화 나와요” 이야기하고 다니며 좋아하시는 분위기다. 그런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사진 제공_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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