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처음 접한 건 <살인의 추억>(2003) 개봉 직후로 기억된다. 영화를 본 후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미스터리가 또 어디 있을까 감탄하던 차, 동료 기자가 미미 여사(미야베 미유키의 한국 내 애칭)의 <화차>를 추천해줬다.
현재 변영주 감독에 의해 영화화가 진행되고 있는 <화차>는 과거의 빚을 청산하고 새 인생을 꾸리고 싶었던 세키네 쇼코(후에 신조 교코로 밝혀지는 여자)가 신용불량과 개인파산으로 신분을 숨기면서 몰락한 과정을 쫓는다. 휴직 중인 형사 혼마가 조카의 실종된 약혼녀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문제의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화자의 상상,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실루엣으로나마 살짝 정체가 묘사될 뿐 끝까지 정확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과연, 중심이 되는 인물이 제대로 등장하지 않음에도 이를 구조 삼아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이 <화차>와 <살인의 추억>은 놀라우리만치 흡사하다. 그때부터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면 출간되는 족족 구입해 읽고 또 읽었다. 지금도 내 방 책꽂이엔 그녀의 작품만 스무 권이 넘을 정도다. (가장 최근에 손에 넣은 작품은 중편집 <구적초>다.)
미미 월드에 입문하게 된 특별한 계기 때문일까.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늘 봉준호 감독이 생각났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살인의 추억>을 보고 미미 여사의 소설을 읽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둘의 작품은 정말이지 많은 점에서 닮았다. 특히 사회가 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관심이 많아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그대로 구조로 차용하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특유의 서술법은 봉준호 영화와 미미 여사 소설의 전매특허다. 이 둘의 작품엔 절대 악이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허투루 다뤄지는 인물이 없다. 미미 여사의 사회파 미스터리 <화차>부터 Sci-Fi <가모우 저택사건>, 에도물 <외딴집>까지, 봉준호 감독의 미스터리스릴러 <살인의 추억>부터 괴수물 <괴물>, Sci-Fi <설국열차>까지. 인간 본위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까닭에 캐릭터의 사연에 맞춰 알맞은 구조를 가져오다 보니 특정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미미 여사의 소설을 읽을 때면 항상 그녀의 작품을 원작 삼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상상해보곤 한다. 그런 기대감이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FILM2.0 재직 시절 가졌던 미미 여사와의 인터뷰에서였다. 그녀는 인사말에서부터 “봉준호 감독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했다. 이에 내가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미미 여사는 얼른 “감독님을 만나게 되면 제 작품도 영화화해줬으면 한다고 꼭 전해주세요.”라고 말해 단순한 팬 이상의 호감을 드러냈다.
그날 미미 여사가 은근히 봉준호 감독에게 영화화를 원한 작품은 그녀의 필모그래프에서도 가장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었다. (다시 한 번 밝히지만, 일본에서는 판권 확정 작품이 아니거나 판권 협상이 진행 중인 작품의 경우, 제목을 공개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어 제목을 밝히지 못함을 알려드린다. 다만 살짝 힌트는 드린다. ^^;) 일본에서도 한 차례 영화화된 적이 있지만 워낙 완성도가 떨어지는 까닭에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바로 그 작품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미미 여사는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판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후 봉준호 감독을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만나자마자 봉준호 감독에게 미미 여사의 바람을 전달했더니 ‘허걱’ 미야베 미유키가 누군지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닌가. 내심 그들의 조합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미스터리소설을 워낙 좋아하는 봉준호 감독이어서 당연히 미미 여사를 알 줄 알았건만 모른다는 답변 이후 심지어는 관심조차 드러내지 않았더랬다. 아~ 불쌍한 우리 미미 여사.
그런데 웬걸, 2008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만난 봉준호 감독은 (그는 당시 <도쿄!>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았다.) 먼저 그녀에 대해 물어왔다. “미야베 미유키는 어떤 작가예요?” “<ooo>란 소설은 어떤 내용인지 알아요?” 이유가 있었다. 봉준호 감독이 묵고 있는 호텔로 미미 여사의 영화 에이전시 팀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ooo>의 영화화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다는 의미?’ 그건 아니었다. 수소문 끝에 칸까지, 그것도 숙소로까지 찾아온 그들의 정성에 마음 약한 봉준호 감독이 차마 거절 의사를 밝히지 못하고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자며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그때를 대비해 봉준호 감독은 미미 여사와 <ooo>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다 싶어 봉준호 감독에게 <ooo>를 영화로 만들어야 되는 이유에 대해 늘어놓았다. “미미 여사가 감독님이면 판권료도 안 받겠대요.” “요새 삼부작영화가 유행이잖아요. <ooo>는 세권짜리에욧!” 급기야, “아, 감독님! 그냥 저를 봐서 만들어줘요.”
결론을 말하자면, (봉준호 감독이 3년 주기로 영화를 개봉한다는 전제 하에) 적어도 2015년까지 미미 여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마더>(2009) 이후 차기작인 <설국열차>가 2012년 개봉을 앞두고 한창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다가 봉준호 감독의 마음속엔 이미 <설국열차> 이후의 차기작도 정해진 상태란다. 그런 상황에서 봉준호 감독이 한권도 아닌 세권으로 구성된 <ooo>를 읽을 수나 있을지 우선적으로 그런 의문부터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 소식을 들으면 미미 여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더> 개봉으로 다시 봉준호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재미난 소식을 들었다. 미미 여사가 봉준호 감독을 직접 초청해 일본에서 만났단다. 그 자리에서 봉준호 감독은 미미 여사에 대해 잘 모르며 책은 읽은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양해를 구했다. 마음 좋은 미미 여사는 이에 개의치 않고 대신 자신의 책을 읽어줬으면 좋겠다며 그 자리에서 미리 준비해온 한국판 <ooo> 세권을 봉준호 감독에게 선물했다. 봉준호 감독은 책을 받고는 속으로 이 세권을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고민에 휩싸였다. 그때 미미 여사는 <ooo>에 나왔던 인물이 다시 등장하는 <oo> 두 권을 더 선물해 봉준호 감독을 경악시켰다는(?) 얘기다.
봉준호 감독에게 미미 여사와 만난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어쩌면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작품처럼 인간적일 수 있는지 흐뭇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봉준호 감독이 미미 여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자세히 알게 됐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혹시 알아, 봉준호 감독이 그녀에게 선물 받은 작품을 읽고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전격적으로 영화화를 결심할지. 다음에 혹시 봉준호 감독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좀 더 꼬드겨봐야겠다. 미미 여사 저만 믿어요. ^^;
글_허남웅(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