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을 부르는 슬픈 노래
H(에이:치) | 2002년 12월 26일 목요일 | 정성렬 이메일

이 영화가 처음 기획될 당시 제목은 <살인비가>였다. 당시 제작을 준비하던 영화사가 휘청거리면서 프로젝트가 공중에 뜨기 시작했고, 주연으로 낙점 되었던 신은경이 출연을 번복하면서 다시 한번 타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충무로에서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좋은 시나리오라는 점에서 유력 영화사들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고 결국 <반칙왕>, <쓰리> 등 꽤 쓸만한 작품들을 선보였던 영화사 봄에서 제작을 결정했다.

영화사가 결정되고 나서 작품에 대한 진척은 꽤 빨라지기 시작했다. 염정아가 신은경을 대신해 카리스마 넘치는 여주인공으로 선택되었고, 떠오르는 신인 지진희가 그의 파트너로 임명되었다. 성지루, 조승우 등의 쟁쟁한 조연급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과연 어떤 영화가 나오게 될지 관계자들의 안테나가 바짝 솟아 올랐다. 티저 트레일러의 감각적인 영상이 조금씩 소개되기 시작하고, 스틸이 일부 공개되면서 영화에 대한 기대는 엄청나게 부풀어 올았다. 잔혹하면서도 슬프고 또 강렬한 인상을 지닌 작품이란 소문이 빠른 속도로 충무로에 퍼졌으며,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에 맞서도 하등 문제가 없는 한국 영화라는 지지를 얻어 내며 개봉일도 극장가 최고의 성수기라는 크리스마스 전후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리고 실제 영화를 보았을 때 느꼈던 것은 꼭 한마디 뿐이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라는 것. 한국 스릴러의 야심찬 도전으로 여겨졌던 <에이:치>는 다시 한번 그 한계만을 절감케 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 하고 말았다.

이 영화의 장르는 보도된 것처럼 범죄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 <레드 드래곤>이나 <한니발>같은 혹은 <쎄븐>과 같은 우울하고 그로테스크 하며 극중 인물들 간의 교묘한 심리전을 미덕으로 하는 장르다. 이런 영화들이 성공하기 위한 요건은 물론 탄탄한 시나리오와 극적 재미가 기본이 되겠지만 일단은 매력적인 캐릭터의 설정이 그것이다. 앞서 나열한 작품들은 하나 같이 매력적인 캐릭터 혹은 극의 축을 이루는 캐릭터들이 극의 흐름을 앞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산발적으로 섞이는 것을 막아준다. 하지만 <에이:치>는 그런 것이 없다. 사악한 범죄자 '신혁'역을 맡아 새로운 도전을 선보인 조승우에게서 '한니발 렉터'와 같은 카리스마를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촬영 종반에 투입 되 부랴부랴 음흉한 미소를 연습해야 했던 조승우 뒤에는 아무래도 <후아유>나 <와니와 준하>같은 유약하고 미소년 같은 순수함이 너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극의 축이 지진희나 염정아에게 제대로 옮겨져 있었느냐. 절대 아니다. 일단 염정아의 연기는 한마디로 한숨이 쏟아질 정도로 실망스럽다. 가장 치명적인, 담배 피는 장면의 연속은 극의 집중력을 떨어트리게 할 정도로 어색하다. 게다가 강한 척하며 아픔을 삭이는 캐릭터로는 너무나 건조하고 심심해 보여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의 얼굴이 가려울 정도다. 그나마 지진희의 연기가 브라운관의 그것을 벗어나 많이 진보했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그에게 모든 짐을 지우기에는 애초에 뭔가 잘못되었다.

캐릭터들이 살아나지 못하게 되자 감독은 내러티브를 강조하면서 다양한 논리를 부여하고자 극의 흐름상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마구 쑤셔넣기 시작했다. 월경주기, 배란주기 등등의 복선이 등장하고 전문용어의 선택을 통해 설득력을 가진 작품임을 과시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영화의 허술함을 더욱 또렷하게 바라보게끔 하는 약점으로 작용한다. 영화의 30%정도가 흐르고 나면 대충 이야기가 어떻게 흐르겠다라고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런 이야기 구조에 함정을 만들겠다고 애쓰는 감독이 안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 <선물>의 오기환 감독 등과 동기생이면서도 이제서야 첫 작품을 선보이게 된 이종혁 감독의 <에이:치>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사실을 복습케 한다.

한국형 스릴러는 아직 힘든 것일까. 적어도 수년 전에 선보였던 <텔미섬딩>보다는 이야기가 명확하게 마무리된다는 점에서(그렇다고 1+1=2 같이 매끄럽게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관객과의 커뮤니티에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할리우드의 그럴싸한 이야기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실망을 줄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오프닝 장면에서 보여지는 데이비드 핀처의 <쎄븐>에 대한 가위눌림을 봤을 때, 감독 역시도 그럴싸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썼음이 분명한데, 미안하게도 <에이:치>는 스릴러라는 장르가 얼마나 손대기 힘든 장르인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총 2명 참여)
ejin4rang
제목이 심오하다   
2008-10-16 15:27
kangwondo77
리뷰 잘 봤어요..좋은 글 감사해요..   
2007-04-27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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