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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꽃을 되살리다 <범죄소년> 이정현
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 김한규 기자 이메일


오랜만에 영화 홍보로 인터뷰를 한다. 감회가 새롭겠다. 얼마만인가?
2011년 단편영화 <파란만장>으로 스크린에 컴백했지만 그 때 인터뷰를 안 했다. 영화 홍보로 인터뷰를 하는 건 <하피> 이후 12년 만이다.

<파란만장>에서 ‘무당’ 역을 맡았었다. <꽃잎>의 광기어린 소녀 모습이 살짝 보이기도 했다.
둘 다 신기(神技) 있는 캐릭터라서.(웃음) <파란만장>을 통해 관객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극장을 찾은 관객 수가 적어서 아쉬웠지만.

<범죄소년> 캐스팅은 <파란만장> 때문에 이루어진 거라고 하던데.
<파란만장>이 아니었다면 <범죄소년>에 출연할 수 없었을 거다. 이게 다 <파란만장>의 연출을 맡은 박찬욱 감독님 덕분이다. 영화배우로 다시 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감독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범죄소년>에서 맡은 효승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미혼모다. 왜 이렇게 센 역할만 맡는 건가?
<꽃잎>의 소녀 이미지가 너무 강했나보다. <꽃잎> 이후 들어왔던 작품을 보면 죄다 센 역할 뿐이었다. 강한 역할을 피하다 보니 영화 작업 기회를 놓쳤다. 가수로서 무대에 서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기와도 멀어졌다. 그러다가 <파란만장>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 역할 자체가 셌지만 영화가 너무 하고 싶었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님이니까 믿고 출연했다.

<범죄소년>은 강이관 감독을 믿고 출연한 건가?
<사과>를 너무 좋게 봤다. 당연히 감독님의 연출력을 믿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하겠다고 했을 때, 회사에서 반대가 심했다. 영화에 출연하면 중국에서 열릴 연말 공연을 전면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수익을 다 포기하고 영화에 출연하기에는 손해가 컸다. 게다가 노 개런티로 출연하니까 사장님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미혼모라는 캐릭터를 잘 소화해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서 영화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 때문에 갈등을 많이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의를 거절했다.
결정적으로 마음을 움직인 건 뭐였나?
미혼모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시나리오를 받은 후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충격이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미혼모 이야기였는데 보는 내내 정말 안타까웠다. 미혼모 대책이 얼마나 허술한지 알겠더라. 그들을 보호해주는 사회적 제도가 전반적으로 너무 미흡했다. 직업 교육 기간도 짧았다. 그러니 사회에 나온 아이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거다. 그 순간 이 잔혹한 현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죄소년>은 올해 도쿄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출연한 배우로서 기분이 좋겠다.
우리 영화가 세계 영화제에서 주목받을지 몰랐다. 단지 소년원, 미혼모 등 사회적인 문제를 단 몇 명이라도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에 참여했을 뿐이다.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나니 소속사 사장님에게 면목이 서더라.

미혼모 효승은 연기하기 편한 캐릭터가 아니다. 처음에 어떤 방식으로 캐릭터 구상을 했나?
처음에는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막막했다. 단순히 생각했을 때 미혼모도 엄마니까 모성애가 느껴지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들을 오랜만에 만나는 효승에게 그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미혼모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주위 깊게 보면서 그 안에 효승을 대입시켜봤다.

효승이라는 인물이 흥미로웠던 건 세상의 차가운 시선을 버티며 살아가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특히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웃음 짓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원래 시나리오에서 효승은 필요 이상으로 어둡고 눈물 많은 여자였다. 아들을 데리고 온 효승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눈물 보다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자존심 버리고,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웃음 짓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감독님에게 캐릭터를 바꿔보자고 얘기했다. 다행히도 감독님이 의견을 받아들여주셨다. 그래서 지금의 효승이 탄생하게 됐다.

효승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장면이 또 하나가 있다. 바로 소년원에 있는 지구(서영주)를 데려온 후 자신이 신세지고 있는 미용실 원장 후배에게 사정을 얘기하는 모습이다.
대책 없고, 뻔뻔하지. 효승이 철면피라는 걸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강 공원을 걷다가 지구아빠 이야기를 서슴없이 말하는 장면에서도 효승의 성격이 잘 표현된다.
효승이 지구를 찾은 이유는 단지 아들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다. 효승은 아들에게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는 엄마이고 싶었다. 그래서 매번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효승의 인생을 망치게 만든 장본인은 지구 아빠다. 그와의 기억은 효승에게 큰 아픔이다. 그럼에도 아들에게 자신의 슬픔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웃으며 아빠 이야기를 한다. 아들에게까지 슬픔을 내보이지 못하는 효승은 참 불쌍한 여자다.

효승에게도 모성애는 있다고 본다. 남들과 달라서 그렇지.
한없이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일반적인 모성애와는 다르다. 효승은 오랫동안 아들과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살가움보다는 낯설음이 크다. 지구에게 옷도 사주고, 용돈도 주는 등 아들과 친해지기 위한 효성의 노력이 그녀만의 모성애다.
영화를 통해 서영주와 호흡을 맞췄다. 영주는 이정현을 배우로 기억하던가? 아님 가수로?
내가 98학번인데, 영주가 그 해 태어났다.(웃음) 어렸을 때 내가 부른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다는데, 제목은 잘 모르더라. <꽃잎>도 모르고. 그냥 같이 연기하는 착한 누나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둘의 호흡이 가장 중요했다고 보는데.
처음에는 효승과 지구처럼 서먹한 사이였다. 영주가 사춘기라서 말도 별로 없고, 나도 친근하게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라서 어색함이 맴돌았다. 영주가 드라마에 출연을 많이 해서 그런지 액션이나 대사에 힘이 들어가더라. 영주에게 연기에 대한 조언을 해주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단지 여관에서 효승이 지구를 때리는 장면을 찍고 애가 많이 놀라서 맘이 좀 쓰였다.

여관 씬은 효승의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 중 하나다. 영화를 보니 영주를 사정없이 때리더라.
(웃음)정말 미안했다. 그 장면 촬영 당일 영주한테 “세게 때릴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라고 말했다. 정말 세게 때리려고 마음먹었거든. 감독님도 그걸 바랬고. 그랬더니 영주가 “마음껏 때려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라. 막상 촬영에 들어가고 내가 때리기 시작하니까 애가 놀래더라. 얼마나 많이 놀랐는지 그 장면에서 영주는 대사도 까먹었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감정에 이끌려 액션을 했을 뿐이다. 촬영 마치고 그 다음날 일어나보니 팔뚝에 멍이 들어 있었다. 여관 장면은 영주나 나나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웃음)

미용실 오열 장면도 여관 장면만큼 효승의 감정이 폭발하는 부분이다.
미용실 원장 후배 집에 얹혀살다가 쫓겨나게 되는 장면이다. 그 때 중압감이 컸다. 원 씬 원 테이크로 가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한 번에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감독님이 ‘큐’ 사인을 주시기까지의 그 몇 분이 너무 괴로웠다. 감정도 잘 안 잡히고, 부담감은 쌓였다. 복잡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단순하게 생각했다. 비굴하게 살았던 효승이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낸다는 생각으로 연기했다.

현장의 부담감이 감정 폭발을 위한 촉매 역할을 한 것 같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대한 효승의 감정에 몰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들과 함께 길바닥에 나 앉게 생겼으니 엄마라면 다 그런 행동을 했을 거다. 어떻게 보면 이 장면도 효승의 모성애가 잘 드러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듣기로는 촬영장에서 맏언니 역할을 했다고.
현장에 가보니 스탭들이 다 동생인거다. 촬영장에서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다보니 힘든 내색조차 못했다. 가끔씩 스탭들 기를 살려주기 위해 회식비도 냈다. 물론 회사돈으로. 돈 많이 썼다고 대표님한테 전화오고 그랬지.(웃음) 그러다보니 스탭들이 잘 따랐다. 스탭들이 도중에 도망가지 않을까 싶은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는데, 다들 잘 따라와 줬다.
영화가 열린 결말로 끝난다. 이 모자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나?
모자의 어두운 현실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범죄소년으로 낙인찍힌 지구도, 가난에 찌든 효승도 가난이란 늪을 벗어나지 못 할 거다. 그들에게 가난과 세상의 차가운 시선은 계속 반복될 거다. 희망은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일어날 것 같다.

영화는 개인의 잘못도 있지만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 사회의 잘못도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효승의 삶이 지구에게 대물림된다고 생각하니, 공포스럽더라.
불쌍하다. 실제 이런 모자가 우리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아프다. 영화를 통해 미혼모들의 삶을 마주하게 됐다. 죄가 아닌 가정형편이 안돼서,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소년원에 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도 알게 됐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영화를 본 사람들만이라도 소년원 아이들과 미혼모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특히 미혼모들이 사회에 적응 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갖춰지기를 바란다. 법무부에 근무하는 분들도 영화를 봤으면 한다.

가수로 무대에 올랐을 때,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기분이 남다를 것 같다.
무대는 재미있고 신난다. 하지만 여운이 짧다. 영화는 반대다. 촬영 내내 힘들지만 보람이 크다. 여운도 오래 남는다. <꽃잎>때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다.

<꽃잎>때 5.18의 아픔을 간직한 소녀를 잊을 수 없다.
신문에 난 <꽃잎> 오디션 공고를 보고 참여했는데, 정말 운이 좋았다. 장선우 감독님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감독님 보고 싶네.

감독님이 지금 제주도에 살고 계시지 않나.
제주도에서 찻집 하신다. 친구들이나 영화 관계자들이 오면 옥돔이나 광어를 대접한다고 들었다. 언제 한 번 찾아봬야 하는데.

어느 인터뷰를 보니 <블랙 스완> <멀홀랜드 드라이브> <파이트 클럽>을 좋아한다고 하더라. 공통점이 있다면 다 센 영화다.
이야기나 이미지가 강한 영화이기는 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들을 좋아한다. <블랙 스완>은 인간의 심리를 너무 잘 표현했다. 배우다 보니 주인공 심리를 더 잘 이해하게 되더라. 마지막 장면도 끝내주고.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묘한 끌림이 있다. 자극적인 영상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파이트 클럽> 같은 경우는 개봉 당시 봤을 때는 그냥 그랬다. 30대 넘어서 보니까 재미있더라.
평소에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인가?
영화 보는 거 너무 좋아한다. <레퀴엠> <스위밍 풀>도 좋아하는 영화다. 옛날 고전 영화도 챙겨보는 편이고. 친한 감독님들로부터 좋은 영화를 추천받기도 한다. 대학 다닐 때도 영화를 많이 봤다. 영화 관련 리포트도 많이 제출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다.

연기에 대한 갈증을 영화 보는 걸로 충족시킨 것 같다. 중국에서 드라마를 찍은 걸로 아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나?
상대 배우는 중국말로 나는 한국말로 대사를 하다 보니 자유로운 연기가 안됐다. 같은 언어로 했다면 감정이 더 살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매번 남았다. 그러던 찰나에 <파란만장>과 <범죄소년>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동안 갖고 있던 연기에 대한 갈증이 충족됐다. 가슴속에 시들었던 연기의 꽃이 다시 살아났다고나 할까. 꽃이 만개할 때까지 노력할거다.

김한민 감독의 신작 <명랑 - 회오리바다>에 캐스팅 됐다고 들었다. 올 겨울도 찬바람 실컷 맞겠다.
이번에는 바닷바람을.(웃음)

어떤 역을 맡았나?
조선 수군 임씨(진구)의 아내 역으로, 이순신 장군(최민식)에게 도움을 주는 여인이다. 영화가 남자들 이야기지만 홍일점이라 기분은 좋다.

올 겨울 스케줄은 꽉차있겠다.
<명랑 - 회오리 바람>에 최선을 다할 것 같다. 이제 영화배우로 관객들을 만나고 싶다. 단 몇 명의 관객이라도 나에겐 소중하다.

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     

2 )
smmja0
'이 잔혹한 현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내용이 인상 깊네요. 아직 범죄소년을 보진 못했지만 이정현씨가 간접적으로나마 미혼모를 체험하며 아픔을 공유했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꽃잎에서 보여줬던 폭팔력있는 연기를 여기서 한번 보여줄것 같아요 꼭 보겠습니다.   
2012-12-04 17:11
veloce2
저는 인터뷰에 언급된 단편영화 파란만장을 본적이 없어서 이정현씨의 배우로써의 면모를 범죄소년에서 처음 봬었습니다 연말 콘서트를 포기하고 범죄소년에 노게런티로 출연할 만큼 미혼모의 열악한 환경을 알리고싶었다는 부분에서 이정현씨의 진솔함과 아름다운 성품을 옅볼수있는 인터뷰였습니다 부디 대박나시길 바래요!   
2012-12-02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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