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문제적 영화
- 문제적 가족 !
텔레비전에서 9시 뉴스 전에 방영되는 30분 짜리 홈드라마 속의 가족은 가족이데올로기라는 환상으로 포장되어 왔다. 피붙이에 대한 본능적 결합으로 꽁꽁 뭉쳐서, 식탁에선 많은 대화가 오가고, 앞뒷집 사람들끼리 콩닥거리거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화장한 얼굴로 잠이 들고, 아침이 되면 생각 없이 즐거운 얼굴로 또 식탁에 모이는, 그럴싸하게 행복해 보이는 가족. 가족 구성원끼리의 희생과 봉사에 열심인 착한 사람들만 등장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니면 현실성 없는 비정상적 관계를 묘사하거나.
[바람난 가족]은 점점 개인화되고 해체되어가고 있는 우리시대 가족의 모습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보통의 홈드라마가 담지 못하는 가족의 실체를 그림으로써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고착된 가족 관념, 가족의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가족의 가치의 회복을 답습하는 대신 오히려 이 시대에 맞는 가족 관념이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보다 솔직하기 위해 바람을 피우며 가족이라는 집단이 강제해온 도덕률을 뻔뻔하게 무시한다. 이러한 역설을 통해 [바람난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자유와 진정한 행복이 과연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이전의 모럴이나 가치관을 비웃는, 그들의 이야기 [바람난 가족]은 그래서 문제적 영화이다.
- 문제적 바람 !
지금까지 대부분의 영화에서 바람은 윤리도덕에 반하는 불륜으로 다루어져왔다. 가부장적인 가족질서 안에서 바람은 가족 해체의 주범이며 당사자는 죄인취급을 받았다. 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불륜 소재의 몇몇 영화에서 진일보한 여성관, 가치관등을 내보이긴 했지만, 불륜영화를 내세워 여성의 성적 환타지 묘사에 더 치중하거나, 심하게는 전통적 가치관으로 불륜이나 외도를 단죄하는 퇴행을 보이기도 했다.
[바람난 가족]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바람난 사람들이 오히려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도발적인 역설을 담고있다. 아내와는 못하는 과감한 요구와 행동을 애인과의 섹스에서 해소하며 일상의 탈출구를 찾는 남편, 남편과의 관계보다는 애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아내, 평생 자신에게 짐이 되었던 남편이 죽은 후 애인과 드디어 진짜 인생을 시작하는 예순의 시어머니, 그런 시어머니를 응원하는 며느리.. 그들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파국에 이를 것이 뻔한 콩가루 집안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들 각각에게 바람은 지루한 일상을 지탱해주는 생활의 힘이며, 때로는 그 일상을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문제적 바람을 피우는 그들이 벌이는 섹스는 관객의, 영화의 성적 환타지나 흥분에 복무하지 않는다. 남편과의 무의미한 섹스가 애인과의 통쾌한 섹스가 되기까지, [바람난 가족]에는 절정으로 건너뛰어버리는 전형적인 섹스가 아닌 발단부터 절정까지의 전 과정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커트되지 않은 섹스가 그려진다. 그들은 바람을 통한 섹스에서 대담하고 솔직하게 소통, 자신의 만족을 이끌어 낸다. 환타지로서의 섹스가 아닌 우리의 침대 속에서 벌어지는 리얼한 섹스, 전세대에 걸친 섹스는, 영화 속 주인공들 만큼이나 뻔뻔하고 솔직하다.
- 문제적 아내 !
지금까지 많은 영화, TV드라마에서 여성들은 항상 바람의 피해자였다. 파장난 가정 안에서 괴로워하거나, 그 현실에 좌절하는 모습이 그녀들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바람난 가족]의 아내, 호정은 남편의 외도에 "까짓거, 유부남도 연애할 자유는 있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하고, 자신 역시 새로운 애인을 찾아, 대담한 맞바람을 핀다. [바람난 가족]의 또다른 아내, 병한은 60평생 자신에게 제대로 된 섹스 한 번 못해준 남편 대신에 새로운 사랑을 찾아 오르가즘을 느낀다. 오히려 바람을 통해 새로운 정체정을 찾은 그녀는 자식들에게 떳떳이 재혼의사를 밝히고 제 2의 인생을 찾아 떠난다.
[바람난 가족]의 여성들은 배우자 혹은 본인의 혼외정사의 부도덕을 비난하거나 고민하는 대신, 거침없이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바람난 가족]의 두 명의 문제적 아내와 그들의 섹스는 2003년을 살고 있는 수많은 아내들과 여성들에게 적잖은 논란을 안겨줄 것이다.
- 문제적 배우와 문제적 감독 !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눈물]을 통해 관객들에게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감독 임상수. 그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과 우리 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통찰력은 평단과 관객 모두로부터 항상 논란의 초점이 되어왔다. 세번째 영화 [바람난 가족]은 전작들보다 주제의식면에서 깊어졌고 그 표현에 있어서 더 나아갔다.
주연배우 문소리는 작년 한 해 베니스영화제 신인배우상을 비롯, 청룡영화상, MBC영화상, 춘사영화제, 영평상, 여성영화제, 디렉터스 컷 등 거의 모든 영화상을 휩쓴 배우. 2002년 가장 최고의 격찬을 받은 그녀는 지난해의 기대에 보란듯이 [바람난 가족]에서 전작과 전혀 다른 모습과 캐릭터 구현을 위해 열연했다. 황정민은 2002년 MBC영화상과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연기력을 입증받은 새로운 기대주이다. 설경구, 송강호의 뒤를 이어 연극계에서 건진 또 하나의 커다란 발견이 될 그의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감독 임상수와 배우 문소리, 황정민, 2003년 하반기 한국영화계의 기대되는 결합이 아닐 수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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