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개봉 3주 차에 330만 관객 돌파! 세 번째 장편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여름 텐트폴 시장 공략에 나선 엄태화 감독이 받은 중간 성적표다. 쟁쟁한 경쟁작들과 베테랑 선배 감독 사이에서 관객과 평단 모두를 사로잡으며 ‘엄. 태. 화’ 라는 세 글자를 각인한 감독. 여름 성수기에 개봉했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경험이요, 많은 배우와 함께 작업하며 크게 공부한 현장이었다고 한다. 반상회 씬에 출연한 36명의 배우에게 깨알 같은 전사를 일일이 적어드린 것도 모자라, 첫 촬영 후 한 분 한 분께 전화 걸어 그 의견을 청취했다는 감독을 만났다.
강동원 배우와 함께한 <가려진 시간>(2016) 이후 7년 만에 관객을 찾는다. 공백이 길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전작을 끝낸 후 2년 정도 작업한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결국 잘 풀어내지 못했었다. 하던 걸 멈추고 다시 시작하기로 한 시점이 2019년이다. 원작 만화를 보고 회사에 건의해서 만들게 됐다. 중간에 코로나 팬데믹을 거친 데다 후반작업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올해 여름 전쟁에 뛰어들게 됐다. (웃음)
후반작업을 하며 바뀐 부분이 있나.
지난해 개봉을 목표로 작업하다 개봉 시기를 늦추게 돼 1년이라는 시간이 더 생긴 거였다. 덕분에 CG 등의 퀄리티를 올릴 수 있었다. 어차피 다 찍어 놓은 거라 내용이 바뀐 부분은 없지만, 블라인드 시사회 등의 리뷰를 청취해서 이를 편집하는 데 반영했다. 관객이 흥미롭게 보는 걸 첫 번째 목표로 해서 지루하거나 늘어지는 부분을 덜어냈다. 최대한 예측하기 어렵게 흥미진진한 방향으로 다듬어 나갔다.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이 원작인데, 어떤 면에 끌렸나. 또 변주하면서 주안점은.
원래 디스토피아 물을 좋아하기도 하고 특히 2부의 아파트 배경이 흥미로웠다. 무언가 한국사회를 집약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좋은 공간이라 이 부분에 확 후킹됐던 것 같다. (웃음) 각색하면서 원작처럼 ‘혜원’(박지후)이 주인공인 버전도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버전이 있었다. 변주 혹은 변화의 기준은 영화적 ‘재미’였다. 관객이 어느 인물을 어떻게 몰입하며 따라갈 수 있을지, 인물의 서사가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았다.
장편 데뷔작 <잉투기>(2013)부터 당시의 현실과 맞닿은 이슈를 소재로 꺼내 들고 있다.
현실이나 사회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인물이나 현상의 이면을 보는 걸 좋아한다. 그렇다 보니 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 혹은 사회적인 문제와 맞닿는다고 느낄 수 있겠다. <잉투기>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표면과 이와는 다른 속 면을, <가려진 시간>은 흥미진진한 공간으로 보였던 판타지 세계의 양면을 그렸었다. 이번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유토피아같이 보이는 아파트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려 했다. 아파트는 내가 잘 알고 있는 공간이라 그만큼 잘 묘사하고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관객 역시 몰입하고 공감할 정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영탁’역의 이병헌 배우와는 나름의 인연이 있다고.
박찬욱 감독님의 <쓰리 몬스터>(2004) 연출부 막내로 있을 때였다. 그때 파주 세트장에서 촬영했는데 이번 이병헌 선배와의 첫 촬영장이 똑같은 곳이라 감개무량했다! <쓰리 몬스터>에서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영화 속 영화 제목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내 등에 그 제목이 써 있었다. 빼앵 돌다가 이병헌 선배의 얼굴이 잡히는 씬으로 24번째 테이크만에 오케이가 나서 다들 기뻐했었다. 그런데 조 감독 형이, 내가 붐마이크를 거꾸로 들고 있는 걸 발견했고 결국 다시 찍어야 했다. 31번째에 성공했던 것 같은데, 병헌 선배가 나는 기억 못 해도 당시 촬영 에피소드는 기억하고 있더라.
이번에 함께한 소감 혹은 곁에서 지켜보며 느낀 점이 있다면.
30년간 그렇게 많은 작품을 했는데도 여전히 새로운 얼굴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극 중 ‘영탁’의 회상 장면을 모니터링하면서 그 절규하는 표정에 정말 빨려 들어갔었다. 선배도 와서 보고는 자기도 처음 본 얼굴이라고 하셨다. 분장팀도 그렇고, 다들 이런 표정은 처음이라고 감탄했었다. 참 잘 나온 장면이 아닌가 한다.
‘영탁’이 선과 악의 경계에 있는 어떤 연민을 일으키는 인물이라면, 그와 대척점에 선 ‘명화’(박보영)는 한결같이 연대와 공존을 주장하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한편으로는 평면적인 캐릭터라는 인상이다. 반면 명화의 남편 ‘민성’(박서준)은 무엇보다 가족을 우선 챙기는 아주 현실적인 인물로 가장 공감대가 큰 캐릭터가 아닌가 한다.
개인적으로 영탁이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민성은 정말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으면 했다. 가족이 너무 소중한 나머지 가족이 당할 위해를 막기 위해 극한 상황에서 어떤 선을 넘는 인물로 말이다. 명화의 경우,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자칫 평면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그렇지 않도록, 또 말만 정의로운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이 부분을 제일 경계하며 구축해 나갔다. 인물에 입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 감정 변화가 느껴지도록 안배했다. 그렇기에 초반부 첫 반상회에서 명화가 던지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중요했다. 명화도 그 답은 모르지만, 그럼에도 질문하지 않을 수 없고, 같이 살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였다. 또 명화에게 무엇보다 절박한 건 아파트 주민들도 주민이지만, 남편 민성의 변화를 막는 거였다. 단순하게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박서준 배우와 박보영 배우는 먼저 출연을 제안했다고.
너무 기뻤다. 시나리오를 보고 먼저 출연제안을 받는다는 점에서 감독으로서 평생 쓸 운을 다 끌어다 쓴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민성과 명화의 전사를 극 중이 아닌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용해 전한 점이 특색 있다.
명화와 민성이 데이트하는 것부터 결혼식까지 소품 사진을 많이 찍었었다. 두 배우가 전사를 그리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말이다. 이렇게 찍은 사진을 영화 속에서 다 사용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고, 영화 외적으로 활용해 몰입을 유도하면 좋겠더라. 둘의 전사를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보고 온다면 좀 더 흥미롭게 극을 지켜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낸 아이디어였다. 많이 관심 가져 주셔서 기분 좋다.
박보영 배우는 ‘내 손을 잡고 따라와’라고 느낄 정도로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더라. 덕분에 처음에는 초 긴장했다가 한결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고. 보영 배우는 평소 자신의 연기에 만족한 적이 드물다고 고백하기도 했는데 (웃음) 곁에서 본 그는 어떻든가.
영탁이나 민성은 시나리오상에 그 노선이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면, 명화는 미묘한 선을 잡고 가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서로 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캐스팅 시 연기 잘하는 분을 모시는 게 우선이라 굳이 내가 먼저 디렉션을 하지 않는 편이다. 배우분들이 시나리오를 해석하고 연기하는 걸 지켜보는 게 무엇보다 즐겁기 때문이다. 다만 내 생각과 크게 다른 그림일 경우 대화하고 의견을 나눈다. 보영 배우는 원체 주변 사람을 잘 챙기고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더라. 내면이 단단하고 자기 스펙트럼을 깨고 나가려 노력하는 배우라고 느꼈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언급하긴 그렇지만, 결말을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이 컸을 것 같다.
등장하는 인물이 여럿이라 관객이 어느 인물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엔딩이 달리 느껴지도록 설계했다. 그래서 희망적으로 느끼는 분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절망적이라고 다르게 느끼는 분도 있을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무드와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희망을 보여주려 했다. 명화가 반상회에서 질문했듯이, <콘크리트 유토피아>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질문을 던지는 행위에 대한 질문까지가 영화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통해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닌 한번 생각해보자는 질문을 던지는 게 의도였다.
극 중 ‘노래자랑’ 시퀀스는 배우들에겐 리허설이라고 공지한 후 실제로는 촬영한 거라고 들었다. 이병헌 배우는 아주 기발한 감독이라고 감탄하기도!
배우분들은 리허설 때 아무래도 릴렉스해지는데 이때 얻어지는 살아있는 순간이 있다. 이렇게 얻은 테스트 컷을 실제로 영화에 많이 사용했다. ‘노래자랑’ 장면에서 특히 좋았던 건,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카메라가 좀 흔들렸었다. 이런 흔들림이 지진이라는 재난상황을 더 실감나게 살리더라. 리허설이라 배우들이 뛰는 것도 춤도 대충 췄는데 그게 오히려 사실감을 더했다. (웃음)
‘박찬욱 키즈’로 불리는데 과연 이번에 박찬욱 감독과 GV를 진행했다.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
지난해 후반 편집이 어느 정도 된 버전을 보여드린 적이 있다. 아마 <헤어진 결심> 개봉쯤이었을 거다. 그때 감독님이 ‘지금도 좋은데 경험상 후반작업을 길게 하면 완성도가 높아지는 게 느껴지더라’고, ‘프레임 하나하나 넣고 빼고, 또 사운드 하나하나 높였다 낮췄다 하며 고민해 보라’고 하신 말씀이 크게 도움됐다. GV 하면서는 ‘어떤 트릭이나 요행을 부리지 않고 정석적으로 만들었는데, 잘 만들어진 걸 보니 좋다’라고 하셔서 기뻤다. 감독님은 지금도 그렇지만 새로운 걸 계속해서 생각하는 분이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시고 아주 성실한 분, 그래서 ‘감독님의 길을 따라 가면 되겠구나’ 하는 믿음과 신뢰감을 주는 분이다.
세 번째 장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 같은가.
흥행이 잘되든 되지 않든 여름 텐트폴 시장에 개봉한다는 것 자체로 의미있는 일이다. 이런 경험이 개인적으로 아주 중요하고,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이렇게 많은 배우와 함께 작업해 본 적이 없어서 이 부분이 아주 큰 공부가 됐다. 특히 반상회 장면을 찍을 때, 그 자리에 모인 36분 모두 실제 활동하는 연기 잘하는 배우분이라 리허설하면서 고민했었다. 세 분만 같이 해도 중간에 변경사항이 생기면 연기 흐름이 꼬이곤 하는데 수십 명이 있다 보니, 내게 막 질문하면 어떡할지 걱정되는 거다. 그래서 최대한 해당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적어 드렸었다. 몇 호에 사는 인물인지, 가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와 그 전사까지 아주 디테일하게 알려드렸다. 리허설 후에는 한 분 한 분께 따로 전화해서 톤이나 분위기에 대해 어땠는지 의견을 물었었다. 이를 반영해 이후에 약간 변경해도 워낙 베테랑분들이라 내가 간략히 말씀드려도 찰떡같이 캐치하시더라.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 작품의 기저는 무얼까. 또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몇 개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있지만, 정해진 건 없다. 앞으로 찍고 싶은 장르는 호러다. 사실 호러 영화를 못 보는데 그렇기에 무서움이 무엇인지 잘 안다고 생각하고, 무섭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기저라 하면… 어떤 분은 영화를 정말 영화로만 즐기고 끝나는 일종의 현실도피로 생각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재미도 재미지만 더불어 생각할 거리를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거다. 나는 개인적인 취향이 후자라, 마냥 행복하고 마냥 판타지인 영화로 가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2023년 9월 1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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