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영이 이런 것도 할 줄 아네?” <독전> 이해영 감독
2018년 5월 30일 수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 학교 씨름부에 몸담으며 시작되는 이야기 <천하장사 마돈나>(2006)로 이해영 감독은 제27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과 각본상을 거머쥐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5)에서는 ‘소녀’에게 인간 이상의 괴력을 부여한 신종 판타지를 선보였다. 고정관념을 배반하는 설정과 대상을 바라보는 입체적인 시각을 보여주던 그가, 특유의 색깔을 잠시 뒤로하고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돌아왔다. 맹렬하게 돌진하는 장르물 <독전>이다. 거친 자극과 폭력성, 그리고 정공법에 가까운 장르적 규칙을 구현한 그는 말한다. 자신의 새로운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영화계 내부에서 “이해영이 이런 것도 할 줄 아네?” 소리가 나올 만큼.

당신의 전작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독전>의 변화를 보고 꽤 놀랄 것 같다. 다행히 일반 관객 반응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전작을 본 사람이 많지 않아서...(웃음) 제일 큰 반전이 엔딩크레딧에 뜬 이해영이라는 감독 이름이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렇게 봐줬다면 감사한 일이다. 기존과는 다른 작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20대 후반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해 쉴 틈 없이 작가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덜커덕 감독이 돼서 지금까지 왔다. 전작 <경성소녀: 사라진 소녀들>을 끝내고 나니 문득 너무 한 군데에서만 에너지를 끌어다 썼다는 생각이 들더라. 여러 보일러 중에 하나만 돌리면서 살아온 것 같았다. 지금 관성과 틀을 깨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았다. 언젠가는 동력이 달릴 것 같기도 했고.

감독으로서의 생명력에 대한 고민인가.
그렇다. 영화계 내부에서 이해영이라는 감독이 들어가 있는 서랍은 정해져 있는 편이다. 그 서랍에 오래 머물다가는 영화를 계속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직업인으로서, 상업영화 진영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내 상업성을 증명해야 하는 때였다. 그간의 작품과는 완전히 궤가 다른 무언가를 한 번쯤은 해내야 한다는 필요와 갈증이 있었다. 영화계 내부에서 ‘이해영이 저런 것도 만드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거칠고 극적인 장르물 <독전>이 그 결과물이군.
장르 영화는 사전에 작품 소개를 접한 관객이 특정한 종류의 재미와 감동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관람에 임하는 작품이다. 작품이 관객과의 약속을 지킬 때 그 관람 형태가 완성된다고 본다. 어릴 때부터 그런 작품에 매혹된 순간이 많았다.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가 <E.T>(1982)였으니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를 필두로 8~90년대에 개봉한 극장 영화를 많이 봤고 특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열광했다. 하지만 내가 연출한 영화에서는 명쾌하게 장르 영화를 구현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독전>에서 처음으로, 정공법으로 장르 영화의 규칙을 따랐다.
예매율이 <데드풀2>와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를 거뜬히 눌렀다. 초반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좀 아까 <독전>이 내 전작들과 데뷔작의 스코어를 넘어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에게는 모든 것이 첫 경험이다. 매우 크고 소중한 경험이 될 것 같다.

영화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꽤 많은 관객이 처음부터 ‘이선생’이 누군지 알겠더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연출할 때부터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반전을 충격적으로 그릴 요량이었다면 훨씬 더 속임수를 많이 썼을 것이다. 관객 뒤통수를 치는 데 공력을 들였겠지.(웃음)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원호’(조진웅)의 입장이었다.

예컨대 ‘원호’의 어떤 입장인가. 그가 왜 그렇게 ‘이선생’을 쫓아가는 건지 의아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그런 반응에는 좀 놀랐다. <독전>이라는 영화는 맹목적으로 무언가에 달려드는 게 기본 속성이고‘원호’는 질주하는 인물이다. 인물의 전사는 거두절미하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일 거로 생각했다. ‘원호’의 전사를 말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를 몰아쳐 나가는 속도가 느려졌을 거다. 관객도 인물의 사연과 감정을 강박적으로 설명하는 전형적인 한국영화로 받아들일 것 같았다.

조연 배우의 존재감이 주연만큼이나 크다. ‘보령’역의 진서연, 언어장애인 남매 역의 김동영, 이주영까지…
진서연 배우가 맡은 ‘보령’ 역은 가장 많은 오디션을 본 역할이다. 놀랍게도 수많은 여성 배우가 한결같이 여성여성, 귀염귀염, 섹시섹시한 연기를 하더라. ‘진하림’(김주혁)의 부속품 같은 설정으로 말이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진하림’ 위에 군림하는, 약간은 무서울 정도로 남자를 압박하는 역할을 연기해달라고 디렉션을 주면 다들 그렇게 혼란스러워했다. 4~5개월간 오디션만 보고 있으니 제작사 용필름의 임승용 대표가 그만 좀 보라고 할 정도였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배우는 없다고.(웃음) 정말 낙담했다.

그러다가 진서연 배우를 만나게 됐다.
한효주에게 연락이 왔다. <반창꼬>(2012) 때 같이 연기한 언니가 있는데 한 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말이다. 사실 감독 입장에서 배우가 추천하는 만남은 부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미안하고… 어쩔 수 없이 만났는데 (진)서연이가 사무실에 짠하고 등장하자마자 너무 무서워서 깜짝 놀랐다.(웃음)

(덩달아 웃음)
“이민호 옆자리더라?” 라는 영화 속 대사를 하면서 사무실에 들어오는데 ‘락’(류준열) 역할을 대신하며 보조를 맞춰주던 연출부가 진짜로 쫄아서 자기도 모르게 위축된 연기를 하더라. 애교랍시고 이상한 연기를 하는데 너무 징그럽고, 그 애교를 안 받아줬다가는 한 대 맞을 것 같은 카리스마까지 느껴졌다. 그러다가 학다리 같은 이상한 요가 자세를 취하는데… 정말 무서웠다.(웃음) 그 무서움이 미치도록 좋아 바로 함께하게 됐다.

남매 역할로 분한 김동영, 이주영 배우와의 만남도 궁금하다.
김동영은 한 번도 같이 작업해본 적 없지만 김종관 감독의 중편 <엄마 찾아 삼만리>(2005)에 출연했을 때 천재 같은 연기를 선보여 뇌리에 박혀있었다. 동영이를 먼저 마음속으로 낙점하고 형제를 구상했다. 그런데 (김)동영이 옆에 어떤 남배우를 갖다 붙여 놔도 다 식상하더라. 요즘 남배우는 다 아이돌 같은 느낌이라… 그러던 어느 날 (이)주영이를 만나면서 마지막 조각이 맞춰진 거다. 주영이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갑툭튀’ 연기를 한다. 호흡도 너무 신비롭다. 마치 유전자로 연기하는 느낌인데, 류승범을 처음 봤을 때 받은 느낌과 비슷하다. 형제라는 설정을 바로 남매로 바꿨다. 두 사람이 나오는 투샷은 정말 너무 사랑스럽다. 만족스러워 미칠 것 같은 조합이다.(웃음)

고 김주혁 배우와의 작업도 큰 의미로 남아있을 것 같다. 그의 유작이니만큼 더더욱.
<비밀은 없다>(2015)에서 (김)주혁 선배의 독하고 센 느낌을 발견했다. 거기에 기름을 조금만 부어주면 활활 타오를 것 같더라. <독전> 시나리오를 주면서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많았다. 그런데 <공조>(2016)에서 악역을 너무 잘 소화하더라. 거기서 그렇게 잘 해버리면 내 작품은 어떡하냐고 그랬더니, 그가 “다를 텐데, 왜…” 하고 답하더라.(웃음)

김주혁 배우, 말 많은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워낙 성격이 그렇다. 사무실에도 마실 나오듯 와서 내게 질문을 많이 한 다음,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면 아무 말 없이 다시 돌아가시곤 했다. 캐스팅보드에 붙은 배우 사진을 하나씩 둘러보고 돌아가는 식이다. 전체 리딩 할 때까지 대사를 제대로 읽은 적도 없었다. 리딩 때도 너무 작은 목소리로 대충 읽는 바람에 다들 수군댈 정도였다. 아무도 그가 어떻게 ‘진하림’을 연기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베테랑 배우의 연기 방식을 당연히 존중해야 하겠지만, 전체를 조율해야 하는 감독 입장에서는 걱정됐을 법도 한데.
주혁 선배가 너무 구체적인 이야기를 안 해주니까 오히려 그와 합을 맞춰야 하는 (조)진웅 배우가 나를 계속 조르더라. 워크샵이라도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웃음)

술이라도 먹으면 이야기를 털어놓을 까봐?(웃음)
그런데 주혁 선배는 술을 안 드신다. (류)준열이도 안 먹고, 진웅 배우는 때마침 술을 끊었고, 차승원 선배는 워낙 퇴근 시간을 칼같이 맞추시는 분이라…(웃음) 아무튼 분위기가 그렇게 되니 그제서야 주혁 선배가 “잘 할게” 하고 한마디 하시더라. 걱정하지 말라는 거였다. 현장에서 그가 ‘진하림’을 연기하는 첫 장면을 봤을 때, 나를 비롯한 배우와 모든 스태프가 강렬한 경험을 했다. 아직도 그 순간을 이야기한다. 감독 입장에서는 그의 캐릭터가 내 영화에 담겼다는 게 영광스러울 정도다.

장점이 많은 영화지만, 호평만 있는 건 아니다. 일각에서는 15세 관람가라기에는 너무 수위가 높다는 말도 왕왕 들려온다.
누군가는 15세 관람가로는 너무 세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청소년 관람불가로 하기엔 너무 약하다고 한다. 감독 입장에서 등급은 권한을 벗어난 일이다. 그저 주어지는 거다. 다만 등급에 연연하면서 촬영하지는 않았다. 장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표현을 충분히 다 했다. 그럼에도 관객이 견딜 수 있는 불편함의 최대치가 어디인지 그 경계를 계속해서 고민했고, 영상물등급위원회가 그런 노력을 좋게 봐준 게 아닌가 한다.
속칭 ‘남탕영화’라고 말하는 기존의 액션물이나 누아르와 큰 차별점이 없다는 박한 평가도 있다. 이해영 감독의 본래 색을 좋아했던 입장에서는 나올 수 있는 의견이라고 본다.
<독전>의 원작은 남성성의 끝판왕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는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2012)이다. 원작을 변주해야 했던 만큼 운신의 폭이 넓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독전> 같은 장르물을 연출하기 위해 (제작사에) 고용된 감독인 만큼 내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게 임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역시 연출 과정을 좀 더 즐길 수 있는 때가 되면 지금보다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다. 기존의 남성영화와는 다른, 이해영만이 할 수 있는 어떤 것 말이다.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이제는 모든 작업이 끝나고, 관객의 평가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다. 손익분기점을 무난히 넘고 크게 흥행하길 빈다.(웃음) 최근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독전>을 연출하기로 결정한 뒤 정말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수험생처럼 강박적으로 자신을 가두며 작업했다. 촬영하던 4개월 반 동안 한 번도 술을 먹거나 논 적이 없다. 즐기느라 놓치는 무언가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시간에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처음 해보는 장르인 만큼, 작업이 다 끝날 때까지 절대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로 찍었다. 그러다 보니 아직 그 고독에서 많이 빠져나오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언젠가는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이 오겠지?

지금도 있을지 모른다!(웃음)
그러려나. 이런 건 좀 있는 것 같다. 지금보다 젊을 땐 혼자 있는 게 좋았다. 그게 자유롭기도 했고, 해방감을 느낄 때도 많았다. 그런데 나이를 조금 더 먹으니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가 소소하게라도 행복한 것 같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만 나오는 내 모습이 있다. 나 역시 그런 모습을 좋아한다. <독전>이 다 끝났으니 이제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려고 한다.

듣다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마치 수험생처럼 독하게 몰아쳐서 작업하는 것과 예전처럼 행복한 감정으로 즐기며 작업하는 것, 어느 쪽이 당신에게 더 효율적이던가?
그런 건 시험 결과지를 받아보고 판단해야지!(웃음)


2018년 5월 30일 수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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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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