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파’가 아니다, 앞으로 ‘아프지 말자’는 거다 <허스토리> 민규동 감독
2018년 6월 29일 금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성인의 문턱에서 자살을 선택한 여고생 이야기 <여고괴담 두번 째 이야기>(1999)를 통해 민규동 감독은 묻고 싶었다. 성적, 교우관계, 가정 문제 등 흔히 어른들이 떠올리는 단어들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진행됐던 ‘관부재판’이 성취한 의미 있는 승리를 주목, 스크린에 옮긴 <허스토리>로, 그는 20년 만에 같은 질문을 던지려 한다. ‘할머니들이 아파, 일본은 나빠’ 이런 식의 호소로 할머니들의 아픔과 그분들이 용기 내서 전하는 소중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할머니들이 노구를 끌고 대중 앞에 나서는 이유가 나 아팠으니 그 아픔을 이해해 달라는 것일까. 감독은 역사 속 ‘위안부’로 통칭되는 존재가 아닌 한 명의 개인으로 여성으로의 각기 다른 사연을 들려주며, 다시는 그 누구도 그런 고통을 겪지 않도록 전쟁을 반대하는 할머니들의 강렬한 바람을, 그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한다.

<허스토리>에 대해 평이 좋다.
고마운 일이지만, 아직 관객의 평가가 남아 있다.

영화가 간결하고 담백하면서, 눈물과 웃음을 품고 있다.
영화 속에 유머가 있다면 일부러 웃기려고 유발한 것이 아닌, ‘신사장’(김선영)을 비롯한 너무나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대다수 우리들의 삶을 반영해주는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일 거다. 경건하고 엄숙한 영화일 것 같았는데, 주변에서 볼 법한 친근한 인물들을 보고 느슨해지며 유머가 형성된 게 아닐까 한다. 또, 시사 후 많은 분이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우시는 모습을 봤다.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의도는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마 텍스트와 배우들이 만났을 때 생기는 물리적 효과를 넘어선 다른 화학적인 결과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극 중 캐릭터를 구축하며 신경 쓴 지점은.
극 중 할머니들은 엄청난 상흔을 가진 영웅들이시다. 그분들을 지지하고 이끌었던 ‘문정숙’ 단장 캐릭터도 한번 삐끗하면 인생 망가진다고 딸에게 이야기할 정도로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양심에 이끌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새롭게 살기 시작한다. 그녀 역시 한편으로 굉장히 영웅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남의 일을 남이 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안 되기 때문에 ‘문정숙’ 캐릭터 안에 우리들의 모습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고, 지금 그 사람이 맞닥뜨리고 있는 장애물들이 현재 공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극 중 ‘문정숙’은 부산에서 성공한 여성 사업가이지만, 여전히 남자의 도움이 필요해서 시장을 찾아가서 따지고, 변호사를 만난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는 데 여론이 나빠지자 같은 동료 여성 사업가들이 등을 돌리는 지점에서 배신감을 느끼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딸은 바쁜 엄마를 향해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고 관심을 호소한다. 살면서 뚫고 나가야 하는 여러 허들들이 보여지면서 관객이 너의 이야기, 엄마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로 느낄 수 있도록 노력했다.

흥행을 고려하여 더 상업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눈물을 유도한다든지, 극적 장치를 늘린다든지 말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고 실존 인물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역사적 실재성을 담보해야 했고, 동시에 영화적 캐릭터와 플롯이 주는 재미를 살리려 고민했다. 단순히 옛날이야기를 꺼내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다뤄져야 할 이유가 분명이 있는 화두라고 느껴야 관객의 마음과 닿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눈물이 더 있어야 하고 웃음이 더 있어야 하고 그렇게 계량적인 계산을 잘 못 하고, 그런 본능이 나한테는 없는 것 같다. (웃음)

전형적인 상업 영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평도 있다.
김해숙 선생님이 연기한 ‘배정길’ 할머니의 재판 과정을 6년에 걸쳐 보였다면, 좀 더 전형적인 방식으로 신파적인 멜로 드라마가 형성됐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이제까지 위안부를 소재로 했던 영화들이 거둔 성과와는 별도로 우려의 지점인 위안부 이미지가 고정화 되는 실수가 반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전에 다뤄지지 않았던 근로 정신대 캐릭터 등 여러 사람의 이야기로 구성했다. 상처를 가지고 살아남은 삶의 양식이 다 다르니,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할머니들의 등장으로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입체화되길 기대했다.

위안소를 운영했던 할머니(박정자)도 등장한다.
그녀가 피해자라는 본질은 동일하다. 다만, 생존의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또 만들어진다면, 기존의 인식의 폭을 질적으로 확장시켜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여러 사람의 이야기로, 전형적인 신파 드라마와는 다른 길을 선택하려 했다.

극 중 ‘문정숙’은 현재 한국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장인 ‘김문숙’ 선생님을 모델로 한다. 현재 생존한 인물이기에 여러 면에서 예민한 부분일 수 있는데, 사실과 허구의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실제로 ‘김문숙’ 선생님은 자녀가 다섯 분으로 당신의 가정사를 드러내거나 영화 속에서 부각되는 걸 원하지 않으셨기에, 동의를 구하고 영화적으로 각색했다. 관부재판을 시작할 당시 60대 초반으로 운영했던 사업인 여행사를 이미 그만둔 상태셨다. 그동안 모아두신 재산을 관부재판에 쏟아부으신 거지. 또, 이건 아주 중요한 사실인데, 영화 속 상황과 달리 실제로는 기생 관광 현실을 보고 굉장히 분노하셨던 분이다. 영화에서는 ‘문정숙’이 사고를 친 후 이미지 회복용으로 위안부를 돕기 시작한 것으로 극화됐지만, 실제로는 훨씬 전부터 오키나와에 있었던 위안부 할머니를 발견하고 일본까지 가서 흔적을 뒤지는 등 여러 활동을 하셨고, 문제의식을 가졌던 굉장히 선도적인 분이다. 왜 이런 일을 시작했냐고 물으니 그런 사실을 알고 나서는 돌이킬 수 없었다고 하셨다. 정말 인권 감수성과 양심의 질량이 엄청난 분이다. 너무 영웅적이고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이라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인물로 각색했다. 위안부 관련 뉴스를 보며 딸한테 인생 삐끗하면 끝이라고 이야길 할 정도의 속물적인, 현실적인 모습으로 낮춰 관객이 이입하기 쉽게 했다. 다만, 실제 재판을 뚫고 나가는 엄청난 추진력과 배짱, 지략, 부산 여성의 기개와 호탕함, 자존심, 고집은 많이 반영했다.

‘문정숙’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참고한 인물이 또 있다고 들었다.
정대협 3대 대표님이다. (기자 주 정대협: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현재 윤미향 대표가 이끌고 있음) 할머니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할머니라고 모시고 신성화 시키면서 객체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너와 나 다를 것 없다는 동등한 입장으로 대하는데, 그 부분이 최고의 연대라고 본다. 할머니한테 고함이나 야단도 치고 껴안기도 하고 신전에 모셔두는 박제화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친구같이 지내는 현실적인 인권 활동가의 이미지를 반영했다. 실제와 각색의 비중의 비율을 정확히 따지긴 힘들다. 실제 (김문숙) 선생님께서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봐야 하니 재미있게 만들어 달라고 당부하셨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드라마틱하게 극화시키진 못했지만, 최소한의 각색은 시도했다.

극 중 ‘문정숙’(김희애)의 자녀는 딸, ‘배정길’ 할머니(김해숙)의 자녀는 아들인데, 설정 이유는.
사업하느라 가정을 잘 챙기지 못한 엄마의 딜레마로서 딸의 존재를 내세웠다. 영화는 할머니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나아가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반전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이를 젊은 세대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고통을 인내하고 용기를 냈었던 할머니들이 보여준 노력의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엄마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던 딸이, 엄마의 일을 이어서 할 수 있는 세대로 거듭나는 모습이 중요했다. 엄마에게 후회하지 말라고, 세상이 바뀐 게 없다 해도 내가 바뀌었다는 대사가 중요했기에,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딸 3대로 이어지는 유사 가족으로 그렸다.

데뷔작 단편 <허스토리>(1995), 첫장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를 비롯하여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이번 <허스토리> 역시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의도된 100%의 결과물은 아니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소수나 약자 그리고 이야기로 많이 다뤄지지 않은 부분들에 관심이 있는 거 같다. 남자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서 여러 시도를 해봤는데, 잘 안되더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이전과는 다른 시선과 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간은 할머니들을 위안부라는 개념으로 통칭화해서 박제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분들을 개별 여성으로 바라볼 때 좀 더 깊이 있는 이해와 치유든 위로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자연스럽게 여성 중심의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거다. 다만, 극 중에서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 차이로 ‘문정숙’과 갈등을 겪는 ‘이상일’ 변호사(김준한)는 남성으로, 적절한 성별의 배합이라고 할까, 균형을 맞추려 했다. 정말 영화적으로 각색하려면 변호사를 여성으로 설정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렇지.(웃음) 또, 생각해보면 ‘배정길’할머니(김해숙)의 자녀가 아들이 아닌 딸이었을 수도 있다! 엄마를 이해 못 하고 원망하는 딸 말이다.
실제 그런 고민을 해봤었다. 자신의 인생을 엄마로 인해 망쳤다고 생각해서 엄마를 때리곤 하는 딸을 생각했었는데, 자연스러움을 넘어서 너무 노골적이고 인위적인 배치가 느껴지면 (관객)이 튕겨 나가기 때문에 그렇게 안 했다. 그간 들었던 할머니들의 많은 사연과 증언 중에 제일 인상적이었던 게 아들에게 매독을 물려준 할머니 이야기였다. 자신만 버티고 견뎌서 끝나는 것이 아닌 의지와는 무관하게 아들에게 병을 물려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연이었다. 정말 씻을 수 없는 고통의 대물림 아닌가. 너무 가슴 아팠다.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영화를 기획하게 된 계기를 묻지 않을 수 없다. TV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을 본 후 계속 간직한 화두였다고 알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을 본 당시는 그냥 영화 속 인물을 보는 것처럼 ‘뭐지?’ 하며 지나갔지만, 그 모습이 강하게 마음 속에 새겨졌었다. 그 후 많은 증언집이 출간됐고 그것들을 읽으며 영화화를 시도했는데, 아직은 관객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을 것 같다고 주위에서 얘기하더라. 큰 영화, 여자 주인공, 힘든 이야기, (영화 제작 차원에서) 뭔가 만들어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많다는 거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할머니들이 많이 돌아가셨고 더 이상 미루지 말자고 생각했다. 또, 나만의 계기도 있었다.

개인적인 계기라 하면.
3년 전쯤 딸이 학교에서 위안부 역사를 배우고 너무 분노하더라. 평소 글쓰기를 좋아해서, 위안부를 소재로 하여 포털 사이트에 웹 소설 연재를 시작했었다. 4회 정도 연재했는데, 댓글 중에 ‘너무 좋지만, 공부 좀 하고 쓰는 게 어떨까요’라고 누군가 댓글을 썼었다. 아마도 일본군과 너무 쉽게 화해가 이뤄지는 장면 때문인 거 같았다. 딸은 그 후 공부하고 오겠다고 연재를 중단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위안부 관련 이야기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분들이 간직한 많은 정보와 사연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절실히 깨달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딸이 봐도 훨씬 더 새롭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간 여러 이야기를 써보고 계속 시선의 변화를 시도한 끝에, 재판을 시작한 용기를 냈던 할머니들과 그분들을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아마 위안부의 시선이 아닌 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첫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생들이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할머니들의 과거 재현이 없는 것도 기존 작품과의 차별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재판 속에서 아무 증거도 없이 증언만으로 일본 정부와 부딪쳤던 할머니들의 이야기이기에, 증언의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을 전할 때의 눈동자, 손의 떨림, 목소리의 핏줄 이런 부분들이 굳이 과거에 대한 설명을 필요 없게 하는 강렬한 이미지였다.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를까 봐 이것저것 설명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었다. 스탭들이나 배우들은 당연히 과거를 촬영하겠지라는 관습적인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럴수록 더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컷을 나누지 않고 롱테이크로 촬영하여 정면으로 직시하는 관객들의 체험을 영화의 목표로 삼았던 것 같다.

과거 장면이 나오면 왜 힘들어하고 보고 싶어 하지 않는지 그 부분에 아직까지 질문이 남아있다. 어떤 이미지가 형성되어 고정화 된 게 아닌가 한다. 앞으로 위안부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넘어야 할 산이 아닐까. 사실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참혹한 전쟁 영화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전혀 부담 없이 보고 있다. 과거 장면 재현을 어떻게 하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과거의 아픔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불편함을 넘어서는 서사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캐스팅 얘기 좀 해달라. 특히, ‘문정숙’ 캐스팅에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카리스마와 따뜻함이 공존해야 하고, 배우로서 외국어와 사투리 등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캐릭터다.
50대 여배우의 풀이 그다지 넓지 않기도 했고, 김희애 배우가 ‘문정숙’과 다른 이미지라고 많이들 얘기하시는 데 이미지의 전복은 개인적으로 즐거운 경험 중 하나다. 힘들어도 (배우가) 마음을 연다면 멋진 모험이 될 거로 생각했었다. 다행히 (그녀가) 흔쾌히 평소의 운동과 식이와 미용을 멈추고 몸을 내려놔줬기 때문에 외양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사투리의 경우 리딩 전날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긴 하셨지만, 나 역시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웃음) 영화 속 할머니들의 고통에 비하면 정말 티끌에 불과하기에 힘들어하는 모습이 한편으론 귀엽기도 했다. 이렇게 호탕한 지역 여성 경제인 캐릭터가 흔치 않고 힘든 만큼 값어치 있는 역할이기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도록 다만 열심히 응원했다.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희애 배우가 감독님이 꼼꼼해도 너무 꼼꼼하다고 표현했는데, 바로 그 의미인가 보다! 본인도 꼼꼼하고 완벽주의자임을 인정하는지.
음, 꼼꼼하다고 돌려서 욕하신 거군! 근데 모든 감독이 대체로 그렇지 않나? 하하하. 눈에 보이는 헛점과 오류와 미완성의 지점을 나스스로 참을 수 없는 건 인정한다. 예를 들어, 일본어의 경우, 일본 사람이 안 보는데, 작은 뉘앙스의 차이라며 굳이 그렇게 정확하게 해야 하냐고 질문을 한다면, 개인적으로 그 질문 자체가 납득이 안 가긴 하다. 보통 김희애 배우가 촬영 시 리딩을 한 두 번 정도 한다고 하는데 이번엔 열 번을 넘게 했다. 배우들과 함께, 일대일로, 또 나와 따로 등 결이 다른 배우들 모두와 부딪쳐서 미리미리 어색한지를 다 확인하게 하여 도망갈 길 없는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던 것 같다. 아마 그 불신 받는다는 느낌과 에너지를 미리 다 써버린다는 느낌에 힘들었을 거다. 사실 내가 완벽주의자였다면 이렇게 안 만들었을 것 같다.

이유는.
<허스토리>를 34회차로 완성했는데, 지금껏 내가 만들었던 영화 중 가장 빨리 찍고 가장 포기를 많이 한 영화였다. 만약에 나에게 100회차의 시간과 150억의 제작비가 주어졌다면 훨씬 천천히 더 완벽하게 촬영하지 않았을까! 농담이고, 마음을 많이 비웠기 때문에 촬영하며 즐거웠다. 많은 테이크를 가며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테이크에서 가장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있도록 집중했었다. 빨리 찍고 넘어가야 하니 말이다. 재판 장면 같은 경우도 4회 차밖에 안 된다. 그 정도 속도감으로 촬영하니 순발력을 통해서 우연의 성과를 기대하는 전략은 애당초 불가능했고, 최대한 사전 준비를 많이 해야 했다.

재판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단 4회차에 걸친 촬영 결과라니 놀랍다! 김희애 배우가 감독님이 너무 꼼꼼하셔서 힘들었지만, 결론은 고맙다고 하셨다. 이점을 꼭 전해야 할 것 같다.(웃음)
음, 그건 수습 차원인 거 같은데...

사적인 질문 몇 가지만 하겠다. 작품 속에 인장이 뚜렷한 감독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당신은 후자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다.
만약 내가 글을 썼다면 아주 일관적으로 썼을 것 같다. 글로는 별로 걸러내지 않고 뇌에서 손끝으로 온전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영화를 찾았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았기에, (영화로) 나를 완전히 잘 드러냈다고 지금까지 말하기는 힘든 역사였다. 아주 들쭉날쭉하고 좌충우돌하며 점프컷의 연속이었다. 매번 영화가 전작의 배신 같기도 했지. 불균형 속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라고 할까. 불안감과 긴장감 속에서 내 중심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내 영화의 역사였던 것 같다.

지금까지 학창물, 일상물, 사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해왔는데, 기본적인 지향점은. 극 안에 담고 싶은 가치라고 할까.
흔히 말하듯 인생이 유한하고 이 유한한 삶이 정말 행복해야 하는데, 관습, 시스템, 선입견, 못된 권력 등 행복을 가로막는 요인들이 너무 많다. 힘든 인생 어영부영 시키는 대로 억눌려 살다가 죽을 때 후회하는 많은 사람의 삶과 그런 삶을 강요하는 권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러 장르를 통해, 교훈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하고 싶다. 현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를 잘 끌어나가기 위해 어떻게 연대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첫 장편인 <여고 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경우, 어른 사회에 편입되기 직전에 저항을 꿈꾸다가 손가락질당한 끝에 자살하는 여고생을 그렸었다. 여고생의 자살하면 어른들은 학업, 친구, 가정 문제 등 이런 몇 가지 단어들을 떠올리곤 한다. 이 획일화된 기준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를 얘기하고 싶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허스토리>도 그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파, 일본은 나빠, 이런 방식으로 할머니들의 아픔과 용기 내서 전하는 소중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반일 영화 개념으로 일본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고 치유도 안 될 거다. 반전 영화로서 받아 들여야 할머니들의 외침을 이해할 수 있을 거로 본다. 내 아픔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일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할머니들의 강렬한 메시지 말이다.

영화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는 대중 예술이자 매체인데, 영화감독으로서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만드는지 궁금하다.
영화는 순간적인 즐거움이자 내적 변화를 이끄는 큰 힘을 지닌, 21세기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내 영화를 본 관객이 영화를 보기 전후 미세한 변화를 경험하고 그것이 인생을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영화 역시 하나의 공해가 될 거다.

최근 행복했던 기억이나 인상적인 일이 있다면.
‘문정숙’의 모델이 되신 김문숙 선생님이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눈물 흘리시며 포옹해 주셨었다. 그러면서 정말 고맙다고, 극 중 딸이 엄마에게 후회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시더라. 그 후 왜소한 90대의 몸으로 강렬한 연설을 하시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며 행복하다고 느꼈다. <허스토리>가 그 순간에 비로소 완성됐다는 생각이 들더라.


2018년 6월 29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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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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