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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월향> 예정된 걸작.. 도그빌
egoist2718 2003-08-03 오후 6:06:04 1880   [6]
도그빌에 대한 보도자료를 보고 있던 중 의문이 들었다.
정말 영화<도그빌>은 감독 라스폰트리에의 위대한 걸작중 하나인가?
아니면 그 파괴성으로 인해 시대적인 눈요기 꺼리는 아닐까?하는 이런 엉뚱한 생각말이다.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만들었을까?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감독 라스폰트리에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해부해 보고 싶었을 것이고 또한, 그들의 이기주의적 파괴성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거대한 나라인 만큼 영화적 표현분량도 많아 졌을 것이고 그러므로 인해 감독의 고민도 늘어났을 것이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모든 것을 제외한 열린공간이면서도 한정된 장소라는 극약처방 이었다.
영악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전작 <어둠속이 댄서>보다 강렬한 영화적 형식을 취한 그가 왠지 꺼려진다. 새로운 영상언어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에는 선수라는 생각에 왠지 그의 영화에는 형식미에 의해 은유성은 적지 않았나?하는 이런 의문때문에 말이다.

모두가 걸작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이 영화에 이런 심리적인 거부감이 먼저 들었을까?
숨어있는 걸작이기 보다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부터 예정되었던 걸작..
영화<도그빌>은 바로 예정되었던 걸작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한 언제가는 누가 만들든 나왔어야 하는 영화이고 또한 예상할 수 있었기에, 난 이 예정된 걸작에 슬며시 등을 돌렸다.

그러나 라스폰트리에가 취한 영화의 형식미는 눈여겨 볼가치가 있다.
프롤로그와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 <도그빌>은 영화의 유동성과 연극의 공간성을 이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제가 되었던 도그빌이라는 배경은 넓은무대(?)에 분필로 길과 집을 만들고 공간이라는 것이 없다. 그저 선하나로 이루어진 무대에서 배우들은 분필선을 따라 이동하고 생활한다. 이것 또한 상징하는 것이 너무 확연하고 도그빌이라는 그 자체의 말의 의미와 연관되어지기에 파격적인 형식은 가치의 질보다 소란스러운 관객들의
웅성거림을 먼저 이끌어낸다.
공간은 없고 물론, 무대라는 공간의 제약성은 그 공간의 유무를 따지게 어렵게 하지만 분필선을 따라 이동하는 배우들에 의해 관객은 무하한 상상의 공간을 창출해낸다.
이런 영화적 배경을 선택한 감독의 의도는 바로 미국의 수용성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 자체가 수용(이민,인종)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에 이 공간의 파괴성은 누구든지 입출입이 쉬울 거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 설정의 이중성을 감독은 "도그빌(Dogvilleㅡ의도된 단어의 실수조합)"이라는 단어로 그 이빨을 드러낸다.
개마을 이라고 해석되어지겠지만 개라는 동물의 특징을 짚어 본다면 집을 지키는 일차적인 목적이 먼저 떠오른다. 개가 있다면 방문하기도 어렵고 또한 집 밖으로 나가기도 어렵다. 즉, 소리없이 들어갔다가 나오기는 어려운 미국의 수용성에 대한 이중성을 영화의 초반에 먼저 드러내놓고 시작한다.
솔직히 영화의 형식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나레이션과 겹쳐서 보이는 이 상징성은 영화의 극적인 내러티브를 반감시킨다.

영화가 프롤로그와 9개의 장으로 구성된 형식은 연극의 한 형태를 빌린듯 해서 마치 스크린 안에서 한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을 준다. 이 점은 관객에게 순간적으로 의문,충격 그리고 집중력을 꾀하는 형식으로, 이 투명한 창문으로 둘러싸인듯한 공간이 상징하는 무거운 주제를 먼저 와닿게 한다. 처음부터 영화는 그 배경으로 인해 무겁고 또한 파괴에 의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 영화가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나는 하나하나의 장을 나누어서 글을 쓰고자 한다. 영화가 롱타임에 하나의 상징성에 다양한 비유를 곁들인 영화이므로 이 수고스러운 작업을 스스로 마다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프롤로그

연극을 보거나 소설을 읽을 때 프롤로그는 그냥 지나지는 경우가 많다(중요한 배경이나 인물소개가 있는 코너지만 집중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안되기에). 그러나 도그빌에서 영화이면서 이 프롤로그를 추가한 까닭은 자신의 그리고자 하는 주제의 피력과 관객에게 독특한 형식의 이 영화를 이해시키는 배려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배경(공간의 파괴)안에서 톰(폴베타니)이 마을 주민들과 도그빌의 전경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무(無)의 공간을 유(有)로 보여지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수 있도록 도와준다.
카메라는 톰을 쳐다보고 있지만 동시에 마을 주민들의 생활도 보여지는 아이러니한 형식미는 발가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를 다시금 보는 듯하다..
임금님의 실체는 발가벗음으로써 다 알 수 있지만 그는 그래도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다. 그 임금이 누구인가? 바로 미국이다. 한 개인의 허구성을 빗대어(도그빌안에서는 그레이스,톰, 마을주민) 미국을 비판한다.
결국 프롤로그의 도입은 9개의 나머지 장들의 퍼즐을 마추는 키(key)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꺼번에 드러난 이 흉학한 도그빌의 전경을 보는 것에 대해 거리감이 느껴졌다. 왜 그럴까? 이 개인적인 거부감에 대해서는 천천히 쓰고자 한다.
그러나 이 프롤로그만 보더라도 영화 <도그빌>은 충분히 예정된 걸작으로 보이지 않는가? 어쩌면 이것이 내가 느낀 거부감의 가장 큰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제1장 톰이 종소리를 듣고 그레이스를 만나다.

도그빌의 화제성은 연극과 영화의 만남이라는 것에 있다. 톰이 그레이서(니콜 키드먼)을 만나는 장면 또한 다분히 연극적(공간때문에)이고 또한 영화적(상상력때문에)이다. 보는 것도 바쁜데 쉴새 없이 이해해야지만 말이 되는 <도그빌>은 단순한듯 하면서도 복잡한 영화의 구성에 나레이션을 첨가한다. 나레이션은 부족한 공간의 상상력을 복돋아 주고 동시에 인물들의 심리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짐으로써 심플함에서 오는 무료함을 없에주고 있다. 톰과 그레이스의 만남도 이런 나레이션과 함께 그 비극적 만남에 결코 가볍지 않은 중량감을 전해주고 있었다.
1장에서 가장 눈에 띄인 것은 개뼈를 훔쳤다고 자신을 학대하고 반성하는 그레이스 씬이었다.
이 씬에서 나는 다이아몬드인 줄 알았던 배우 니콜키드먼이 진흙 속에서 나오는 진주같은 배우임을 알았기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니콜키드먼이 연기한 그레이스는 하찮은 개뼈에 의해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왜? 이런 설정를 한 걸까?
그건 그레이스가 앞으로 보여질 인간의 잔인한 이중성에 대한 복선이겠지만, 이것 하나만을 본다면 그레이스는 도덕적이고 순수(선의의 마음)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물이 맑으면 쉽게 더러워지는 법... 이것 또한 예견할 수 있기에 다음 장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도 그레이스의 대사처럼 오만 일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오만의 잔인성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도 어폐가 있다는 것도 사실 아닌가?

제2장 그레이스의 육체노동

2주간의 심사(?)의 시간이 주어진 그레이스는 마을주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애를 쓴다. 봉사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레이스가 도그빌에 살기위한 욕심도 포함되어 있지만, 전 장에서 개뼈를 훔쳤다고 반성한 그녀를 생각한다면 그녀의 선한 의지가 강하기에 봉사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레이스를 중심으로 스토리는 진행되지만 나레이션이 마을주민들의 이중성에 대한 말을 해주었기에(1장에서 그들은 은혜를 베푼것에 대해 우쭐한 것이다) 그녀의 복잡한 동선(動線)만큼 도그빌 주민들의 본성도 엉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나의 중심 축에서 이런 다양한 심리를 담아 낼 수 있는 이유는 정지되어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결국 도그빌 2장의 제목 그레이스의 육체노동은 마을주민들을 자극하는 그레이스의 선한 의지의 역효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인정받기 보다는 점점 더 강한 인간욕구의 표출을 도와준 촉매제이다.

제3장 그레이스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1,2장에서 마을주민들이 그레이스를 수용함으로써 미국의 수용성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잣대의 독선을 보았다면 3장은 미국의 자만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레이스는 쉴새없이 필요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육체노동을 하고 그들의 환심을 얻는다. 그녀가 도그빌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얻는게 가장 중요함으로 그녀의 육체노동은 결실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3장의 제목에 어두운 그림자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마울회의에 의해서 그레이스는 도그빌에 머루르게 되지만
이 조약한 단어들은 그레이스가 마음을 얻었다고 보기보다는 도그빌 사람들이 그녀의 육체 즉 그녀가 가지고 있는 노동성에 길들여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녀를 완벽하게 수용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 자신이 그레이스의 육체노동를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미국이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만을 빗대어 그리고 있었다.
이 점이 그레이스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레이스가 기뻐하는 얼굴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상반되는 어두운 그림자는 수면으로 가라 앉힌다.
이런 부제와 끊임없는 상반된 화면으로 하나의 상징성에 파고드는 감독이 싫어졌다.
모든 이들이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뛰어난 테크니션에 열광하는지도 몰라도 그의 표현은 영화의 형식과는 반대로 관객의 상상을 제한하고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뛰어난 감독에 의해 제한된 상상안에서, 드러난 잔혹한 퍼즐에 또다시 뚜렷한 악마의 숨결을 부어서 무엇하려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감독은 겨우 이 만큼만 스토리를 진행시켰지만 걸작의 조건를 충분히 드러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개인적으로는 이 점이 나의 숨통을 쥐어 틀어서 나머지 장에서 더 많은 것에 빗대어서 표현하는 감독의 표현에 질려가게 만들었다.)
비뚤어지게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나라는 인간으로부터, 이 상징성의 모순과 공간에서 오는 답답성을 느끼게 하니 걸작의 조건은 심술 맞아 보일 정도로 잘 짜여져 있다.

제4장 행복한 나날

나레이션은 친절하게 그레이스의 고운 손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고 말해준다. 그녀의 쉴새없는 육체노동의 댓가로 그레이스는 적은 돈이지만 월급이라는 것을 받고 오래도록 진저(로렌바콜)의 가게에서 팔리지 않는 도자기 인형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이 인형이 그녀가 도그빌에서 인정을 받고 필요한 존재라는 증거로 쓰였다고 관객이 착각할 때쯤, 마을주민들은 그녀에게 더 큰 호의를 보인다. 그녀의 집을 만들어주고 톰은 그런 그녀에게 사랑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레이스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3장에서 표현하던 방식과 똑같이 잔혹하게 퍼즐을 마추라고 강요하고 있다. 어느날 글로리아(해리엇 앤더슨)가 찾아와 남자들의 끈적거리는 시선을 그레이스가 옴으로써 자신으로부터 거두어 간 사실을 고맙다도 말한다.
단편적으로 도그빌 마을 주민들이 그레이스에게 각기 요구하는 바램이 틀리다는 것의 증거이기도 하겠지만, 앞으로 다가올 그레이스 위기를 미리 보여주는 것 같아서 행복한 나날이라는 부제는 극도의 긴장을 끌어내고 있었다.
끈적한 시선? 주민들이 수용의 댓가로 그레이스에게 바라는 욕구들 중 그 출발선이 되는 단어일 수도 있지만, 내부적으로 더 깊게 파고들기를 원하는 감독에 의해, 이 끈적한 시선은 그레이스 즉 그녀의 육체의 필요성에만 관심가지는 도그빌 주민들의
한 단면을 나타낸다.
얼마나 잔혹한가? 행복한 나날이라고 믿었던 그레이스...
마을 주민들에게 마음을 얻었다는 그 믿음이 실은 그녀의 육체의 필요성만을 수용했다는 것을 모르는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은 이중적인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난 그레이스인가? 아니면 도그빌 주민인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내게 한 이유는 행복한 나날이라는 부제속에서 웃는 그레이스에게 닥쳐올 잔혹한 일들을 미리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감독은 그레이스라는 인물조차 관객에게 이물감으로 느껴지는 거리감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결국 앞으로 이어질 그레이스 이야기에 관객은 커다란 분노도 연민도 못 느낄 것이다.. 그녀의 섬뜩한 반전도 무대 밖에서 정지되어 있는 공간을 보는 관객이기에, 우리는 라스폰트리에의 잔혹한 퍼즐 마추기에 흥미로운 시선을 보낼 뿐이다.

제5장 독립기념일

왜 감독은 도그빌이라는 영화안에서 독립기념일이라는 미국의 상징적인 날에 대한 언급을 짚고 넘어가는가?
굳이 독립기념일이라는 장과 부제가 필요했을까? 1장~4장까지 서서히 욕망을 드러내는 도그빌 주민들을 보았던 터라 경찰의 등장으로 흔들리고 더 많은 것을 그레이스에게 요구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전혀 흥미롭지 않다. 그러나 이 예정된 걸작은 헛점이라고는 용납을 못한다. 이것 또한 감독의 상상력 안에 관객을 가두는 효과를 거두므로 이 정지되어 있는 공간의 답답성은 폭발되기 일보 직전까지 간다.
독립기념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우리에게도 독립기념일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기념과는 그 성질을 달리한다.
우리에게는 억압에 대한 해방,자유의 의미가 강하지만, 물론 미국도 그런 의미도 포함한다.
그러나 미국 독립기념일은 엄청난 수용이라는 것을 포함한다. 결국 자유가 있는 곳에 따라오는 자만과 이기적인 도덕성의 잣대들, 이런 의미에 의해서 <도그빌>안에서의 독립기념일은 수용성에 가려진 그들의 추악한 욕망을 상징한다.

제6장 이빨을 드러낸 도그빌

5장에서 드러내 놓고 그레이스에게 노동을 요구하는 주민들을 봤기에 새삼 그녀의 불행을 마주보는 것은 그리 괴롭지 않다. 그러나 마을의 전경를 위해서 잡는 카메라에 빠르게 움직이는 그레이스의 동선을 유머스럽게 잡은 카메라는 그녀의 고통이 더욱 깊어 질거라는 암시를 준다.
그녀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주민들 또한 예견되어 있었을 뿐, 관객들에게 더 큰 충격은 주지 못한다.
잔인한 감독 라스폰트리에는 다시한번 여기서 도그빌이라는 공간의 파괴성을 각인 시킴으로써 이빨을 드러낸 도그빌이라는 제목에 의미부여를 새긴다.
그전에 그레이스도 서서히 도그빌의 실체에 대한 선한 의지를 꺽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심코 베라(이 인물의 정확한 이름인지 솔직히 잘 모름.. 흑인 모녀의 엄마라고 생각해주세요.)의 딸 침대시트를 갈으면서 그레이스는 이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아무도 여기서 못자"
수 없이 갈아 끼워도 득없이 이어지는 그 노동에 그레이스가 처음으로 불만을 내뱉은 것이다. 서서히 도그빌에 불만과 분노를, 그레이스 또한 그녀의 오만한 선한 의지의 그 흔들림에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앞으로의 극적인 비극은 또 한번 여기서 예고되어 지고 있다.
그레이스 때문에 마을을 걸으면서 사색을 하는 톰을 동시에 보여주고, 경찰을 등장시킨다. 여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레이스는 빌(제레미 데이비스)에게 강간을 당한다. 관객의 눈에는 다 보이는 이 잔인한 상황에 그들은 손끝하나 반응하지 않으므로, 이 화면의 확대성은 도그빌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앞에서도 말해 듯이 無라는 공간에 有가 있다는 것을 각인 시킴으로써 관객은 이제 도그빌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퍼즐을 완성시킨다.
물론 이 퍼즐은 안 마추어도 퍼즐에 그려진 그림이 무엇인지는 미리 알았지만 그 진실을 마주보기란 그리 개운한 일은 아니다.

제7장 도그빌에 질려 떠나는 그레이스

이 영화안에서 무하한 상상력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7장은 또한 잔혹한 아름다움도 보여주는 장이다.
제4장에서 끈적한 시선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는가?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이 단어 하나만으로 그녀의 육체가 노동뿐만이 아니라 쾌락의 용도로 쓰일 것을 예견했었기 때문이다.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은 가장 아름답다. 흔들리는 사과트럭 안에서 누워있는 그레이스를 슬쩍 보여주는 덮개는 영화가 지니는 상상력을 극의 지점까지 끌어낸다.
아무런 장치도 없이 단지 흔들리는 트럭이라는 설정만으로 그녀의 탈출이 위태롭게 보이니 잔혹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런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감독은 좁은 공간에서 더 좁아진 공간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카메라로 그녀가 거부할 수 없는 폭력의 집요함을 잡아내고 있다.
잔인한 것은 그 아름다움에서 더 깊게 아로 새겨지고 그녀가 다시 도그빌에 돌아오고 나서의 그들의 잔인한 대접도 트럭안에서의 그녀 육체의 나약함 보다는 덜 잔인하다.
아름다움으로 인해 더 잔혹한 그레이스의 불행? 인간의 추악함과 나약함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작가주의적 감독의 탐미는 그 도를 넘어선 것 같다.
"안좋은 일은 금방 털고 앞일만 생각하는 특별한 재능이 그녀에게 있었다"라는 나레이션은 비극의 조화를 꾀하기 위해 그레이스의 그 오만함을 다시 한번 들추어 내고 있었다.
개를 용서하면 유용한 재주를 익힐 수 없다라는 그들의 말처럼 그들은 탈출을 시도한 그레이스를 용서하지 않고 더 단단한 사슬을 그녀의 목에 메달음으로써 수용의 댓가를 더 잔혹하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제8장 회의에서 진실을 밝히다.

그레이스를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톰은 유일하게 그레이스와 육체적 관계를 안 가진 도그빌 남자 일 것이다.
이 둘의 이런 관계는 그레이스에게 위로가 되기는 했지만, 톰이 도그빌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영화보는 내내 불안감을 떨쳐버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레이스에 대한 고뇌를 핑계로 관계를 요구하는 톰에게 그레이스는 당신도 그들과 같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그레이스가 톰에게 불만이 있어 했기 보다는 유린된 자신의 육체에 대한 고통을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톰은 그 말로 인해서 그레이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을내 위치에 커다란 위험요소가 될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버리고 그레이스를 선택한 자신에게만 육체적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 그레이스에게 정곡을 찔린 것이다. 회의에서 진실을 밝힌다는 8장의 설정은 그레이스가 당한 폭력의 진실이 아니라 톰이라는 인간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장으로 쓰여졌다. 언제나 장의 부제를 하나의 퍼즐처럼 정해 놓는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는 부분이다.
하나의 말장난처럼 장의 부제를 정해놓은 것은 자신의 표현성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처럼 보이고, 왠지 하나의 상징적 표현을 재탕 삼탕하는 것같이 느껴져서 처음 그의 영화를 봤을 때의 환호감을 반감시킨다.
더이상 나올 것이 없다라는 내 스스로의 오만한 결정을 끌어냈으니 말이다.

제9장 방문객이 오고 영화가 끝나다.

드디어 3시간 여의 기나긴 상징과 비유는 현란한 감독의 재능에 잠시 마침표를 찍는 장에 도달했다.
마피아에게 연락해서 방문객에게 그레이스를 넘긴다.
어느 정도 집중해서 영화 <도그빌>을 본 관객이라면 예상되어졌던 반전이었을 것이다.(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충격전인 반전은 아니였다고 말하고 싶다)
감독은 또 한번 집요하게 그레이스의 오만을 끄집어 낸다.
그들을 용서하는 것도 오만이고, 그레이스 자신의 선한 의지를 투영 시킬려고 했던 도그빌에 대한 생각도 그녀의 오만에서 비롯되어 졌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있다.
결국 그레이스와 보스가 서로를 오만하다고 질타하는 대화씬에서 우리는 감독이 거짓말한 것에 대한 눈치를 챌 것이다.
도그빌이 미국의 그 허구성과 이중성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레이스 자체가 미국의 본질이었다는 것을...
오만한 그레이스는 오만함의 편리성에 의해 멋대로 도그빌을 판단한 것이다.
그 편리성은 도그빌에 가해지는 복수라는 결정에 그 본모습을 드러낸다.


시간과 공간의 모호성마저 느껴지는 도그빌 안에서 3시간이라는 상영시간안에 하나의 상징성에 대한 모든 표현을 집어 넣고자 했던 감독 라스폰트리에는 인간의 본성과 미국의 이중성을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정면에 내세웠다.
공간의 파괴성으로 끌어낸 상상력은 감독 자신의 상상력안에 갇히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뚜렷한 상징성은 관객의 상상력 마저 제한하는 효과를 가져옴으로써 이 위대한 걸작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릎 꿇게 한다.
그래서 이 걸작을 내마음대로 예정된 걸작이라고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개인과 단체, 단체와 단체라는 그물망 같은 이 복잡한 관계속에서 한번쯤은 짚어보고 넘어가야 할 영화가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비유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그 선을 넘어간듯 보인다.
이 영화는 잘 짜여진 설계도면을 보는 듯하다. 빈틈없이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설계도면만 보더라도 완성된 건물이나 기계의 완벽성를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화<도그빌>도 상징성에 따라온 비유와 복잡성에 의해 영화적 완벽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정된 걸작이라고 표현해 본 것이다.
그러나 동양화의 아름다움에 비추어 이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는 그 여백의 미가 없는 영화이다.
여백의 미라는 것은 꼭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로 말을 바꾸어서 표현하자면 바로 관객의 몫으로 남겨질 상상력의 여지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관객이 느껴야 할 상상력이 남아 있지 않다.(분필로 그어진 공간마저도 상상력에 갇힘을 느끼게 하니 말이다)
너무나 잘 짜여진 설계도면에 여백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화 <도그빌>은 허름한 비디오 가게에서 우연찮게 찾게 된 걸작이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인정하게 만드는 강력한 주장이 있는 걸작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차기작을 더이상 기대하지 않는다.(상당히 위험한 발언 일 수도 있지만 용기있게 뱉어 본다. 그레이스의 오만처럼..)
그의 다음 영화는 찬사를 또 다시 받게 될 확률이 더 높지만, 그의 작가주의적 탐미와 상상력은 전작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기에...

http://www.onreview.co.kr/index.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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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2003, Dogville)
제작사 : Kuzui Enterprises, Canal+, MDP Worldwide, Summit Entertainment / 배급사 : 코리아 픽쳐스 (주)
수입사 : 코리아 픽쳐스 (주), 스폰지 / 공식홈페이지 : http://www.dogville2003.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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