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나도 이런 시 한 편 쓸 수 있을까
jimmani 2010-04-28 오후 11:13:34 1006   [1]

 

불발로 돌아가긴 했지만 초등학교 때 대회 출전을 목표로 잠시동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동시 쓰기에 대한 강습을 따로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들었던 얘기들 중 아직도 기억에 뚜렷하게 남은 것이 '시의 본문에는 절대 제목이 들어가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때는 그 말이 참 이상했다. 우리는 글의 내용을 분명하게 규정짓기 위해서 제목을 짓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제목에 들어가는 말은 당연히 본문에 들어가게 되는 건데, 내용에 제목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제목이 내용을 대표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한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분명하게 규정한다는 것'은 시와 결코 어울리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겉으로 얘기하지 않고도 무언가에 대해 통찰력 있는 시선을 느끼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시라는 걸 말이다.

 

갈수록 직설적인 것, 거두절미하고 꾸미지 않고 요점만 분명히 말하는 걸 선호하는 시대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 에둘러 얘기하길 즐기는 시가 점점 외면 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이창동 감독의 3년만의 신작 <시>는 점점 많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시'에 대한 이야기를 새삼 꺼내 보이고 있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끊임없이 외우고 파헤친 이후로는 좀처럼 가까이 하려 들지 않았던 시에 실은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가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딘가 시대를 거스르는 것 같은 생뚱맞은 주제라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중요한 얘기다. 시간에 휩싸여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우리가 꼭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을 시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65세의 여인 미자(윤정희)는 딸이 맡긴 중학생 손자 욱이(이다윗)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녀가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강노인(김희라)네 집에서 파출부 일을 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그녀는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될 만큼 넉넉치 못한 형편이지만, 꽃을 좋아하고 단장하길 좋아하는 나이보다 훨씬 어리고 풋풋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요즘 부쩍 말을 하게 되면 특정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 당황스럽다. 그러던 차에 동네 문화원에서 김용탁 시인(김용택)의 시 강좌가 있음을 알게 되고, 시가 너무 배우고 싶어진 미자는 강좌에 등록하게 된다.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좋은 시를 짓기 위해 주변의 사물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미자는 세상을 보다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그 무렵 여중생이 강물에 투신한 사건이 드러나고, 그 배경에 또래 남학생들의 집단 성폭행 사건이 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용의선상에 있는 남학생들 중 욱이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자는 알게 된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충격적인 진실과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 미자는 좌절을 겪는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고만 해도 모자랄 판에, 자꾸 세상의 어두운 모습들이 미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언제나 배우들이 빛난다. 늘 인물들을 절절한 고통 속으로 떠미는 그는 연기 역시 여느 영화 속 인물들처럼 정형화된 연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배우들에게선 언제나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살을 에는 고통이 묻어나온다. 그렇게 인정사정 없는 연기 덕분에 설경구, 문소리, 전도연 등 매 작품마다 그 해 손에 꼽을 만큼의 위력을 과시한 배우들이 등장했다. 이번 <시>에서는 윤정희 씨다. 15년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그녀는 이 영화에서 특히 원톱 주연으로서 대단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영화 전체의 90% 이상 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그녀는 그저 화면에 자리만 잡고 있어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깊이를 풍긴다.

 

 

그것은 억지로 강해보이려 하거나 인위적으로 감정을 짜냄으로써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 감정을 허투루 소비하지 않는 조용한 절제와, 드문드문 틀어막고 있는 입과 감은 눈 사이로 가늘지만 거세게 터져나오는 울음을 통해 드러나는 오만가지 감정이 빚어낸 결과다. 이창동 감독의 이전 영화와 달리 윤정희 씨가 맡은 주인공 미자는 힘든 일을 겪더라도 그 고통을 겉으로 미친듯이 표출하는 사람이 아니다. 슬픔이 엄습할수록 속으로 그것을 삭이고 다독이고 그렇게라도 안될 땐 홀로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만큼 보는 사람까지 정신이 퍼뜩 들게 할 만큼 폭발적인 연기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연륜 있는 배우가 아니라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은은하면서도 깊은 시선과 표정 곳곳에 스민 주름으로부터 비쳐지는 수천 수만가지 감정의 결은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연기가 압도적임을 알려준다. 세상을 너무 좋게만 봤던 미자가 겪는 천길 낭떠러지 같은 심정을 윤정희 씨는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가슴 저미게 보여준다. 이렇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또 한번 배우 최고의 연기를 목격한다.

 

이창동 감독 영화 특유의 '영화가 아닌 듯한 자연스러움'은 이번에도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주변에서 생기는 소음도 걸러버리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키는 그의 방식은 미자를 둘러싼 세계로의 더욱 사실적인 진입을 돕는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그렇다. 저것이 연기를 하는 것인지 습관적으로 나온 실제 모습인지 쉽게 구분하기 힘들다. 미자로부터 자신의 숨겨왔던 욕망을 발견하게 되는 강노인 역의 김희라 씨는 몇몇 장면에서 윤정희 씨와 함께 요즘 배우들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대배우로서의 절대적인 가치를 증명한다. 황혼기에 놓인 인간으로서 그가 연기하는 강노인은 미자와는 다른 의미로 현실의 시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늙어가는 이의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낸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워준 할머니에게 영 퉁명스러운 사춘기 손자 욱이 역의 이다윗, 비중은 크지 않지만 침착하고 부드러운 연기로 영화에 안정감을 더하는 안내상, 연기가 처음이라지만 연기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능청스러워서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김용탁 시인 역의 김용택 시인까지, <시>는 그 마을, 그 도시에 있는 듯 없는 듯 섬세하게 스며드는 자연주의 연기의 향연이다.

 

 

이보다 더 간결할 수 없는 제목처럼, <시>의 내용의 한 줄로 요약한다면 미자라는 여인이 한 편의 시를 짓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언제나 누구에게라도 다가올 수 있는 세상의 소용돌이를 비추길 주저하지 않는 이창동 감독은 그 과정을 미자가 세상을 보다 파란만장하게 겪는 과정으로 확장한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소녀 감성을 잃지 않았던 그녀에게, 하필이면 시를 짓게 되면서 이전에는 만나 본 적 없던 시련들이 한꺼번에 닥치기 시작한다. 이창동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이번에도 여전히, 이런 시련을 미자가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가이다. 그러나 이전 작품들과는 그 접근 방식이 사뭇 다르다. 시가 영화의 주된 소재가 되는 만큼, 영화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또한 시적으로 펼쳐보인다. <밀양>에서 보여줬던 때때로 불편할 정도의 정면 충돌과는 거리가 멀다.

 

다행히도 이창동 감독이 이번에 묻는 것은 <밀양> 때처럼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으로 생각해야 할 만큼 심오한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고민의 깊이는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밀양>이 매우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냈다면, <시>는 상대적으로 쉬운 이야기를 모호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시'라는 문학 장르의 특성을 영화 속에 그대로 투영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어떤 거대한 사건을 배경으로 속에 품고 있을 복잡한 심경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미자는 복잡한 일을 겪으면서도 웬만해선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미자가 들고 다니는 수첩에 수시로 적는 구절들을 통해 어렴풋이 그녀의 마음을 내다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관객들에게 많은 걸 설명하려 하기보다 관객들이 알아서 헤아려보게끔 유도한다. 전체적으로 편집이 느리지 않은 편인데도 영화는 중간중간 불필요한 대사가 없는 풍경과 사색의 장면을 집어넣음으로써 우리가 시를 읽을 때 그렇듯 눈을 감고 지그시 그 순간에 대해 말하지 않고 속으로 곱씹어 보게끔 한다. 미자가 굳이 말하지 않고 수첩에다 구절로 적듯이, 그런 장면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음악이 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오리지널 스코어는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영화는 시처럼 그림과 글의 음악적, 사색적 요소를 기가 막히게 녹여낸다.

 

 

언제나 분명한 답을 제시하기보다 관객들에게 넌지시 질문을 하는 이창동 감독이기에, 뚜렷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 속 이야기에 자칫하면 갈피를 잡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더라도, 그 답을 알아가는 과정은 꽤 분명해 보인다. 팍팍한 세상일수록 똑똑히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보기 좋고 예쁜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놓인 것의 실체를 똑똑히 알아갈 때 그것이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자는 뒤늦은 나이에 이 사실을 깨우치는 과정에서 아픔을 겪는다. 도덕적 가치에 대한 위협과 생활에 대한 위협을 동시에 받는다. 언제나 건너 보기만 했던 고통들이 내 것이 되어 다가오는 순간을 미자는 좀처럼 쉽게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현실 앞에서 미자에게 아름다운 시를 짓는다는 것은 아이러니 투성이다.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나에게 아름답지 못한데, 아름다운 시를 쓰라고 나의 마음은 자꾸 재촉을 하니, 시가 써지지 않는다고 엉엉 울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런 몸부림의 과정에서 미자는 조용히 배워간다. 그렇게 자신을 향해 현실과 마음이 던지는 이중고는 그녀로 하여금 아픔을 내치지 않고, 공허하게 꿰뚫어 보지도 않고, 내 안으로 품게끔 하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었음을 말이다. 쓰디쓴 아픔도 내 삶이 지닌 하나의 결을 형성하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임을 깨닫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말이다. 자신을 짓누르던 아픔에 점점 초연해지면서, 미자는 그렇게 시를 완성해 나간다.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시 강좌 강습생들이 각자 털어놓는 '내 인생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장면은 꽤 의미심장하다. 의외로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란 다양하다. 누구에겐 임대아파트를 마련하던 순간이, 누구에겐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할머니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던 순간이, 누구에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때문에 겪었던 괴로움이 아름답단다. 김용탁 시인이 얘기했듯이, 시상이란(다른 말로는 '자극이 되는 아름다움'이 될 수도 있다) 나 여기 있다고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하든, 예쁘든, 괴롭든, 내가 다가가서 품으면 그것은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일부분으로서, 아름다운 시 구절의 일부분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순간 '피같이 붉은 꽃'도 기꺼이 품을 만한 생의 빛나는 한 부분이 된다. 그렇게 시는, 가시밭길 같은 세상 앞에 눈감지 않고 똑똑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길을 보여주는 중요한 가르침이 된다. 

 

말보다 글로 옮기고, 지그시 바라보고, 가만히 생각이 잠기는 미자의 모습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도 어느덧 영화가 안내하는 은은한 사색의 기회를 얻는다. 심오하고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인상쓰고 하는 사색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것들, 내가 통과하고 있는 삶에 대해 한발짝 물러나 고요하게 지켜보는 그런 사색이다. 그래서인지 <시>를 보고 나니 마치 시의 세계 속을 한번 다녀온 듯 아련한 여운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이런 은은한 품격은 분명 근래 겪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싸움과 통찰이 낳은 미자의 시. 나도 그런 시를 생애 단 한 편이라도 쓸 수 있을까. 나도 그런 시를 생애 단 한 편이라도 쓸 수 있을까. 쉽게 잊을 수 없는 마지막 장면 뒤에 이창동 감독이 남기는 질문은 이게 아니었을까.


(총 2명 참여)
gonom1
잘읽었어요   
2010-05-28 00:13
pjk0315
보고갑니다   
2010-05-23 18:34
wjswoghd
해 보자구요   
2010-05-16 19:15
coreaakstp
너무 기대가 되네요~   
2010-05-03 12:46
shin424
잘 쓰셨네요~ 읽고 갑니다~   
2010-04-29 16:51
ssh2821
잘읽었습니다   
2010-04-29 00:53
sinman81
잘보았습니다   
2010-04-29 00:40
ckn1210
감사   
2010-04-29 00:05
1


시(2010, Poetry)
제작사 : 파인하우스필름(주), 유니코리아문예투자(주) / 배급사 : (주)NEW
공식홈페이지 : http://www.poetry2010.co.kr
공지 티켓나눔터 이용 중지 예정 안내! movist 14.06.05
공지 [중요] 모든 게시물에 대한 저작권 관련 안내 movist 07.08.03
공지 영화예매권을 향한 무한 도전! 응모방식 및 당첨자 확인 movist 11.08.17
82300 [시] 감독의 역량이란... (9) skidoo9 10.05.05 781 0
82288 [시] '시'에 대비되는 현실의 추악함을 들추다 (9) kaminari2002 10.05.05 859 0
82285 [시] 찬란한 인생의 흔적 (10) sh0528p 10.05.05 767 0
82263 [시] 이창동 감독님. 감사합니다 (8) shin424 10.05.04 1606 0
82260 [시] 머리가 아닌 가슴을 뒤흔드는 영화 (20) helforum 10.05.04 6317 3
82234 [시] 감동적이예요 (8) yhj1217 10.05.04 724 0
82233 [시] 순수함그영혼에 울림 (10) yunjung83 10.05.04 974 3
82230 [시] 맹숭 맹숭한 ? (8) fishead 10.05.04 722 1
82224 [시] 감동적이었습니다. (7) silversun04 10.05.04 1119 0
현재 [시] 나도 이런 시 한 편 쓸 수 있을까 (8) jimmani 10.04.28 1006 1
81913 [시] 프리미어 시사회 감상-그 끝을 알 수 없는 이창동 감독! (74) sunvolca 10.04.28 10013 10
81438 [시] <시> 거장, 그를 직접만나다 !! (11) hanle1003 10.04.15 926 1

1 | 2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