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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님. 감사합니다
shin424 2010-05-04 오후 10:19:35 1606   [0]

 

 

1. 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항상 지독하고 잔인하다고 느껴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잔인함은 유혈이 낭자한 공포 영화 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가슴 아픈 비극이 있다. 그가 만든 최고의 영화인 <밀양>에서 주인공인 신애는 유괴로 인해 자신의 아들을 잃는 비극을 겪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의 영화에서는 그런 비극을 시작으로 해서, 다른 사람이라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깊숙하고, 넓고, 잔인하게 파고들어가서, 고통스러운 심연 속으로 보는 이들을 집어넣고,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마치 광활한 바다를 마주하고 거기에 빠져서 나오기 위해 헤엄을 치지만,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항상 잔인한 현실 속에서 쉽게 상처입고 고통 받는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과정은 결코 편한 경험이 아니고, 정말 힘을 쭉 빼게 하고 한숨이 푹푹 나오게끔 한다.

 

 

 

 

 그가 만든 신작 <시>에서도 주인공인 미자는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서 잔인한 일들을 겪는다. 그의 전작들과는 확연히 선을 긋는 - 그리고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 단도직입적인 오프닝 장면부터 그 비극의 강도가 어느 정도 될 지 느낄 수 있는 정도다.

 

 

 미자는 66세인 할머니이다. 그러나 여전히 10대 같은 감성과 고운 웃음을 지닌 천진난만한 소녀 같다. 파출부 일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고 그녀의 손자는 계속 그녀의 속을 썩이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답고 긍정적인 곳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시를 배우고 싶어 한다. 문화원에서 하는 김용탁(!) 시인의 시 강좌를 들으며, 그녀는 사물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고, 시 강좌가 끝나기 전에 시 한 편을 쓰고자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다. 세상을 자꾸만 아름답게 보려는 미자에게 큰 시련이 닥치고 그 일을 통해 세상의 어두움과 잔인함을 보게 된 그녀는 절망과 큰 고통 속에 빠진다.

 

 

 

 

 

2. 이창동 감독은 항상 자신의 각본에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배우를 찾아서 캐스팅을 하고 그 캐스팅을 통해 그들 커리어에서 최고의 순간을 뿜어낸다. <박하사탕>에선 설경구, <오아시스>에서는 문소리, <밀양>에서는 전도연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고치를 다 뿜어냈다면, 이번에 나온 <시>에서는 전설적인 여배우이신 윤정희님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것을 다 뽑아낸 것 같다. 시작에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윤정희님을 생각하고 썼다고 할 정도로, 이 영화는 그녀에게 헌정된 영화인 것 같다. 소녀 같은 어린 심성으로부터 해서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 속에서 보이는 모습 등등... 그녀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거의 모든 장면에 나오고, 거기에서 그녀는 이전에 설경구와 전도연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합다단하게 얽혀있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의 이전 영화에서 보여진 위대한 연기는 그 배우에게서 있는 한계치를 넘는 수준까지 다 짜내서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하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면 이번에 그녀의 연기가 정말 대단한 것은 그녀에게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짜내어 이런 복잡한 감정들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그야말로 엄청난 절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극중의 미자와 완전한 혼연일체를 이루는 듯 하고, 가슴을 무너지게 하는 울부 짓는 장면들 같은 장면은 거의 없이, 그야말로 너무나도 일상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그녀와 반대의 위치에 있는 강 노인이 있고 그 캐릭터를 연기한 강희라 역시 정말 대단한 연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 김희라하면, 작년에 버스타고 학교 다니면서 버스 안에 있는 TV에서 나왔던 충무로 박스오피스라는 프로그램에서 액션 배우라는 이미지로 처음 접했는데, 이번 영화에서 그는 내면적으로는 고독한 장애 노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준다.(장애인 연기하니까 <오아시스>의 문소리가 떠오른다...)

 

 

 

3.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항상 사실적인 터치를 통해 보여주는데 이 영화에서의 그런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터치는 절정에 도달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시>를 통해서 미리 암시라도 하려고 했던 걸까. 이 영화는 예전에 나왔던 러시아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과 같은, 한 편의 숭고한 영상시를 보는 듯하다. 정말 Natural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영화다. 여전히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지만 범위가 그렇게까지 넓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필요하지 않은 군더더기는 다 뺀 것 같다. 시의 특징 중 하나가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이 영화 역시 함축적이다. 주어와 동사를 최소화하고 형용사와 수식어를 많이 사용한 것 같다고 하면 맞는 말이 되려나.

 

 

 (이 영화와는 정반대의 화법과 분위기인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이 영화에는 배경 음악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이 영화에서의 배경음은 자연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강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 - 과 아이들의 소리 등 전부 다 현실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다. 이 순수한 소리들. 이러한 소리들을 통해 영화의 여운을 더 깊게 해 준다. 난 이 중에서 특히 물이 흐르는 소리가 너무 좋다. 특히 처음과 끝에서 들려오는 강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강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미자가 힘을 다해 쓴 시 ‘아네스의 기도’가 낭송되는, 그러면서 그녀가 있었던 곳 - 아파트, 마을, 강 - 을 천천히 비추는 엔딩 장면은 엄청난 여운이 남는 말로도 다 할 수 없는 것으로 단연컨대 올 해 최고의 라스트 장면이 될 것이다.

 

 

 영상 역시다. 사실주의 감독답게 적재적소하게 롱테이크를 사용하여 주인공의 시각에서, 아니면 그 장면에 있는 인물의 시각으로 실제로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또 중간 중간에 보여주는 배경 역시 너무나도 좋았다. 자연 경관과 여러 가지 자연물 - 꽃, 풀잎, 나무, 강 등등 - 을 정말 아름답게 보여준다.

 

 

 

4. 중간에 정말 좋았던 장면이 있다. 시 강좌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에 대해 발표하는 장면이다. 누구는 작은 임대아파트로 이사 왔을 때, 누구는 지금은 죽었지만 살아 계셨을 때에 할머니 앞에서 노래 부르고 가르쳐주었던 일을, 누구는 아이를 낳았을 때, 누구는 사랑을 하다가 배신당했을 때... 각자마다 대답이 다 다르다. 그런데 각자가 말하는 그 순간들이라는 게, 뭐 로또 당첨과 같은 거창한 순간들이 아닌, 고통 속에서라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소박한 순간들이다. 미자가 중간에 시상을 어디 가서 찾는지 물었을 때 김용탁 시인이 직접 자신이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지금 현재에서 괴롭게 하고 온갖 고통을 주는 상황 속에서 새롭게 시상을 찾아서 품을 때,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5. 감독은 이 영화에서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서 시를 쓰고 아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라는 질문과 감독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싶었던 질문. “영화가 죽어가는 시대에 영화를 만든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을 던진다. 시와 영화는,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쉽게 잊게 되는 것, 그러나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시를 쓰는 것, 영화가 죽어가는 사회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그 중요한 것,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용탁 시인이 시 강의를 하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현실 속에서 온갖 어려운 상황에 둘러 쌓여있는 미자에게 아름다움을 찾는 작업인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모순이다. 현실은 어둡다. 아름다움은 죽어가는 것 같다. 그녀에게 자꾸만 상처와 아픔을 주기만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어떻게 해야 시를 잘 쓸 수 있는지를 묻는다. 너무나도 안 써져서, 그녀는 시가 안 써진다고 울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시를 꺼내서, 시상을 찾고, 시를 완성한다. 아마 그녀에게는 아이를 출산하는 것과 같은 고통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시를 통해 세상을 깨달았을 것 같다. 고통스럽든 아니든 삶은 지속되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차 보이는 곳일지라도, 그 속에도, 그 어둡고 비참한 것 같은 삶 속에도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있음을. 나뭇잎 사이로 그녀에게 햇살이 비춰지듯이 우리 삶에는 아직도 일말의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리 뭉개지더라도 그 아픔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그녀는 가슴 속에 갇혀있는 시를 풀어주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도, 과연 그녀처럼 고통 속에서 인고하며 시를 써 낼 수 있을까?

 

 

 

 

 

6. 감독의 전작들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의 현실적 문제들 - 장애인, 노인, 고독함, 성폭력, 경제적으로만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는 것 등 - 을 많이 보여준다. 그것도 전혀 작위적인 요소 없이,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여전히 주인공에게는 많은 시련이 가해지는 것도 역시 그의 전작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이창동 감독님의 전작들에 비해 이 영화는 이질적이다. 직설적인 오프닝부터 시작해서, 전작들과는 다르게 각 장면마다 엄청난 절제의 미학과 서정성이 느껴진다. 여전히 열린 결말이고 - 감독의 주된 메시지인 중 하나인 삶은 지속된다는 것처럼 이 영화 속 주인공의 삶도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인 듯 - 보는 이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답할 여지를 남겨놓지만 카타르시스나 감동을 최대한 배제하는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과는 다른 감성이 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창동 감독님의 최고작이던 아니던, 이건 분명히 걸작이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전작이었던 <밀양>에서의 철학적, 종교적 주제 의식은 빠져나갔지만, 그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깊이는 그야말로 더욱 더 깊어져있고,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이 지금까지 만든 영화중에서 가장 다가서기 쉬운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아직 7달이 남았지만 올 해 영화농사는 다 지은 것 같다. 아마 올 해가 다 가고 나서도 올 해 최고의 영화로 충분히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뭐, 더 할 말이 있을까. 여전히 한국 영화계에서 이런 영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 그리고 이렇게 아름답고 진실 된 영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영화를 볼 수 있게 해 주게 해주신 이창동 감독님께,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 하고 싶다. 이창동 감독님은 확실히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이며, 그의 영화는 확실히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난 또 다시 이창동 감독의 다음 영화를 목이 타들어가는 기다림으로 기다릴 것이다.

 

 


(총 1명 참여)
gonom1
잘읽었어요   
2010-05-28 00:11
pjk0315
보고갑니다   
2010-05-23 18:17
qhrtnddk93
힘들엇겟어요   
2010-05-16 19:16
k87kmkyr
길어요 내용이   
2010-05-15 12:38
snc1228y
감사   
2010-05-13 16:19
kkmkyr
에전이 생각나네요   
2010-05-08 15:57
man4497
감사   
2010-05-07 17:19
skidoo9
실제로 중풍을 겪은 배우 김희라의 열연도 인상적이더군요...다시 한 번 이창동감독에게 박수를 보내고 칸 영화제 희소식을 기다립니다.   
2010-05-05 23:47
1


시(2010,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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