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Lost in title-‘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4년 3월 12일 금요일 | 이해경 이메일

영화 내용보다는 제목에 관한 얘기를 주로 하겠다는 말씀을 미리 드립니다. < Lost in Translation >.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려운 제목입니다. 이 제목도 번역이 되나요? 하고 묻고 싶군요. 영화제목이 아니라면 훨씬 쉬운 일이겠죠. 영화제목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고려할 게 많았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원제와는 전혀 다른 제목이 탄생하기도 하죠.

영화 '프라하의 봄'의 포스터
영화 '프라하의 봄'의 포스터
십수년 전에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던 영화의 원래 제목은, 밀란 쿤데라 소설의 영어판 제목을 그대로 쓴 <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이었습니다. 그 소설이 우리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고,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도 우리나라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시절이었죠. 요즘 같으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이 오히려 관객에게 어필할 것으로 판단할 법도 한데, 당시의 마케팅 감각으로는 그렇게 길고 철학적인 제목을 선택한다는 게 ‘대단한 도전’이라도 되었나 봅니다. 마침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시점이었고, ‘프라하의 봄’이라는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영화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았기에, 제목을 그렇게 붙여놓고는 쾌재를 부르거나 적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았을까… 딴에는, 그렇게 원제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차리리 낫다는 생각도 듭니다.

에어 서플라이의 두 리더, 그래험 러셀과 러셀 히치콕
에어 서플라이의 두 리더, 그래험 러셀과 러셀 히치콕
호주를 대표하는 왕년의 밴드, 에어 서플라이의 감미로운 레퍼토리 가운데 < Lost in Love >라는 곡이 있습니다. 팝송가사를 번역해주는 어떤 사이트에서는 그 노래의 코러스 부분인 ‘Lost in love and I don’t know much…’의 해석을 ‘사랑에 헤매느라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그런 식으로 해놨던데요. 그 풀이대로 < Lost in Translation >을 옮기면 <통역에 헤매다> 쯤이 되겠네요. ‘통역’이 마땅치 않으면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살려 ‘소통’이라고 해도 괜찮고요. ‘이영순 칼럼’에서처럼 ‘이동’이라고 풀어도 좋겠습니다. 어쨌든요, 통역에 헤매든 소통에 죽을 쑤든 이동 중에 삽질을 하든, 영화제목으로는 영 아니올씨다 아닌가요?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영화 수입업자라면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하는 순간인 거죠.

그래서 고심 끝에 지어낸 제목이…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음… 분명히 우리말이기는 하지만 이건 원제보다 더 통역이 안 되는데요. 원제에 없는 ‘사랑’이란 단어가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은 영화 내용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치고, 사랑도 통역이 되냐는 게 무슨 뜻일까요? 쉽게 생각해서 역시 ‘소통’이라고 보면 될까요? 사랑도 주고받을 수 있나요… 그거야 워낙 그럴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그런 거지 뭘 새삼스럽게 물어보기는… 아, 그렇게 입을 삐죽이며 툴툴거릴 게 아니라 좀더 면밀하게 따져봐야겠어요.

머리 하나가 큰, 도쿄의 미국인 밥 해리스
머리 하나가 큰, 도쿄의 미국인 밥 해리스
왜 사랑‘도’ 통역이 되냐고 묻는 걸까요? 통역이 되는 다른 것들이 이미 있다는 뜻이라면 영화 내용과 어긋나지 않습니까? 영화에서 그나마 통하는 사이는 두 남녀 주인공뿐이잖아요. 같은 이유로, 그 제목을 ‘사랑 따위가 통역이 될 리 없지’ 하는 의미로도 해독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나 냉소적으로 ‘사랑’을 바라보는 영화가 아닌 것은 분명하니까요. 사랑을 포함한 모든 ‘관계’가 도쿄의 미국인처럼 겉돌기 십상이다, 뭐 그 정도 아닌가요? 그렇다면 차라리 ‘사랑도 통역이 안 되나요?’ 라고 하는 게 영화의 맥락에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와는 상관없이 그냥 사랑의 통역 여부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뉴욕 비평가협회에서 주는 감독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각본상으로 오스카를 거머쥐었죠. 역시 미국인들인 심사위원들로서는, 영어를 잘 못하는 일본인들을 그다지도 과도하게 부각시킨 각본과 연출의 의도가 의심스럽거나 거슬리지 않았나 봐요. 감독의 그런 자기중심적인 시각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는 이 영화가 그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을 만큼 훌륭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내가 만들어도 그 정도는 되겠다거나, 감독보고 당장 때려치라거나, 그런 주제넘고 도리에 어긋난 망발을 입에 담을 생각은 꿈에도 없으니, 니가 한번 만들어보라는 권유일랑 제발 말아주세요.

저는 다만 이 영화가 현대인의 까닭 모를 공허감 같은 것을 표현하려다가 그만 영화 스스로 까닭 없이 공허해지고 말았다는 인상을 받은 것뿐입니다. ‘침묵의 소리’도 좋고 ‘이미지의 언어’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들만으로 좋은 영화가 될 수는 없는 거지요. 영화는 누가 뭐래도 ‘종합예술’이니까요. 참, 한 편의 영화를 이루기 위해 ‘종합’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에는 ‘제목’도 어엿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글의 중심 테마는 어디까지나 ‘제목’임을 상기해야겠군요. 잠시 영화 내용 쪽으로 한눈 팔려 했던 제 시선을 바로잡겠습니다. 자, 문제의 제목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관한 얘기를 마무리해 보도록 하죠.

쓸쓸한 여자와 피로한 남자,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통역이 필요없는 사랑?
쓸쓸한 여자와 피로한 남자,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통역이 필요없는 사랑?
그러기 위해 곁눈질을 한번만 더 하도록 용납해주신다면, 이 영화를 지탱해주는 것은 연출력이나 각본의 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배우들의 힘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스칼렛 요한슨.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있고 연기도 되는 배우고요. 오십대 중반의 빌 머레이도 초고속 러닝머신 위에서 고생하는 등 애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그도 또한 상 받고 수상후보에도 오르고 했겠습니다만, 빌 머레이의 진가는 역시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과 같은 진품 로맨틱 코미디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사랑의 블랙홀> 말이에요. 역시 영화 내용 말고 제목 있잖아요. 너무 잘 짓지 않았나요? 물론 우리말 제목을 말하는 거죠. <그라운드호그 데이>, 아니면 곧이곧대로 번역해서 <다람쥐의 날>이라고 했으면 눈에 띄기나 했겠어요? <사랑의 블랙홀>. 격조 있는 제목은 아니지만 도리어 적당히 만만해 보여서 좋고, 의미가 분명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영화 내용과도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면서 분위기까지 그럴듯하게 전달하는… 그래서 보게 되는 그 영화는 또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사랑의 블랙홀'의 포스터에서 시계 속에 갇힌 빌 머레이
'사랑의 블랙홀'의 포스터에서 시계 속에 갇힌 빌 머레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도 그런 면이 고려된 제목이겠죠. 그런데 <사랑의 블랙홀>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제목이 영화의 내용이나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뜻을 파악하기가 결코 만만치 않은 제목임이 확인됐지만, 언뜻 보기에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의 냄새를 풍기는 제목이죠. 그런데 정작 영화는 웃음보다는 무겁게 가라앉은 느낌을 전달합니다. 설익은 감이 있을지언정 작가영화에 가까운 색깔을 보여준다고 봐야죠. 장르영화가 작가영화보다 못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작가영화라고 다 무게잡는 것도 아니구요. 요는 제목이 관객을 잘못 이끌 가능성에 대한 우려입니다. 이 영화가 그런 영화인지 모르고 본 뒤에 투덜대거나, 그런 영화인지 몰라서 못 본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관객을 위해서나 영화를 위해서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죠. 그렇게 어긋나는 관객들이 전혀 생기지 않는 영화란 있을 수 없겠지만, 제목 때문에, 그것도 원제의 의미를 감추고 둘러댄 모호한 제목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할 수 있으니까요. 흥행을 위해 의도된 위장이라면, 그런 수법이 흥행에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죠.

여전히 제목만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관객들이 있습니다. 제목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정보 가운데 하나이지요. 좋은 제목의 기준이라는 게 따로 있겠습니까. 따로 있더라도 간단하지는 않을 겁니다. 영화 내용이나 분위기와 엇박자로 가는 제목이라고 해서 모두 나쁜 것도 아닐 테고… 소용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대안이나 생각해볼까요? 역시 통역이든 소통이든 헤맨다는 뜻의 원래 제목이 딱인데요. 코폴라 감독이 제목 하나는 잘 붙였는데, 그 의미를 살리는 우리말 제목은 여전히 어색하고… 쉬운 일이 아니군요. 과감히 원제의 굴레를 벗어나서, <사랑의 블랙홀> 같이 쌈박한 걸로 뭐 없을까요. 도쿄의 이방인? 어이쿠, 이거 안 되겠네요. 야유와 함께 돌 날아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맞기 전에 들어가야겠어요. 하긴, 자기 소설 제목도 못 지어서 끙끙대는 주제에 제가 뭘…

4 )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29
qsay11tem
특이한 제목이네여   
2007-11-27 13:10
kpop20
통역이 된다면 좋을것 같아요   
2007-05-18 23:04
imgold
이 영화 보다가 잠이 들었다는,,-_-ㅋ 그들의 그 어려운 사랑은 아무리 많은 언어를 알고 있어도 절대 통역이 안될것 같다는,,-_-   
2005-02-11 16:22
1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