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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 쾌락의 공범자들
andrew1130 2008-01-01 오전 4:03:14 1218   [0]
 

<쾌락의 공범자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쾌락의 욕구와 본능에 도취되면서, 동시에 죄의식을 느끼고 감추려했던 자신을 말이다. 지금 영화를 보는 나 자신은 영화 속 인물들의 행위에 내 안의 은밀한 무언가를 들켰기에 쓴 웃음을 짓고 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감추고 싶은 내 안의 욕망을 사회적 관습이 지배하는 영화 아카데미 소극장의 공간에서 까발림을 당하기에 진지하지 않은 척, 나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웃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 영화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고, 어떻게 반응할까? 영화의 관람은 영화가 주는 자극과 관객이 반응하는 피드백으로 하나의 실험이 된다. 못으로 자신의 육체를 애무하는 남자를 향해 웃으며 ‘변태자식’이라 외치면서도 죄의식의 감옥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라는 예술을 추구하면서 나는 얼마나 자유롭고 열려있는가? 에 대해 반성하는 시간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나에 대한 진정성에 대한 고민과 그것이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간의 갈등이다. 한 가상의 인간을 통해 삶을 엮어가면서, 내 자신을 넘어서는 스펙트럼을 열망하지만, 언제나 내 안에서 모든 것이 구현될 뿐이다. 지난날의 과오와 복종, 비열함에 대한 위선을 통해 무사안일을 달리는 나의 일상의 행보에서 영화는 그런 나를 성찰하고 반성하게 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에 타협하며 나를 드러내면서도 내가 아닌 척 했다. 성적 욕망의 까발림은 영화로 풀어내기에는 스스로 속박된 면이 많다. 타인이 풀어낸 성적 욕망에 만족하면서, 정작 자신의 성적 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언제나 고민이 많던 내겐 자유로운 상상력은 부족했다. <쾌락의 공범자들> 속 인간들은 욕망을 풀어내, 자유로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다. 이들의 행위는 하나의 행위예술이다. 인간의 욕구 중 터부시되던 변태성욕에 흠뻑 취해, 예술적 경지로까지 뛰어오른다. 열망하고 자유로이 꿈꾸는 이들의 모습은 열정적이고 행복해 보인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한 번 더 생각하고 쓰지 않겠다. 고민하면 나는 어디론가 도망가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냥 받은 느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풀어내겠다. 보통 남자가 가학성이 강하고, 여자는 피학성이 강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역전돼 있다. 부인은 짚 인형을 채찍으로 때리고, 짚 인형은 맞는 것에 흥분한다. 나중에 형사로 밝혀지는 남자는 아름다운 부인과의 잠자리를 멀리하고, 털과, 못, 압정과 같은 도구가 주는 쾌락에 빠져있다. 자신을 학대할 대상이 사람이 아닌 도구라는 차이를 빼면, 짚 인형과 이 남자는 같은 마조히스트다. 이렇듯 영화는 일반적 통념과 정반대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사회적 울타리를 넘어선다. 정해진 경계를 넘어선다. 영화를 통해 받은 인상이다. SHOT BY SHOT으로 이루어지는 라이브 액션 영화(실사 영화)와 FRAME BY FRAME으로 이루어지는 애니메이션을 혼합하며 둘 사이의 경계도 허물어뜨린다. 실사 영화에서 인간은 현실에 갇혀 살고 끊임없이 갈구하고 준비한다. 그리고 그 욕망을 실현하고 극대화하기 위해 죽어 있다고 믿는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애니메이션의 판타지가 펼쳐진다. 가상의 섹스, 마스터베이션을 가장 리얼하고 생동감 있게 실현하기 위해 인물들이 예술적 경지까지로 여겨지는 상상과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의 실천은 인간의 상상력에 대한 욕구가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이 이루어낸다. 이 순간 애니메이션은 현실에 갇혀 욕구를 억제하고 사는 인간의 해방구다. 즉 애니메이션은 자유로운 상상의 구현인 셈이다. 죽은 애완견을 살리고 싶은 열망에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죽은 개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욕구가 낳은 착각이다. 어찌 보면 판타지는 인간의 착각일 수 있다. ‘~했으면 ~ 했었을 텐데’라는 가정법 용법처럼 인간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허무함을 판타지로 채우려 한다. 인간의 육체는 현실공간에서 살아있다. 그러나 이들의 영혼이 살아있는 공간은 상상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가상의 세계는 현실보다 인간을 더욱 활력 있게 하고, 더욱 살아 있게 한다. 인간에게 상상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몰려오는 고통과 불안 슬픔을 무슨 수로 극복할 수 있을까? 일단 떠오르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추동력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현실과 판타지의 믹스이고, 거기에서 인간은 현실의 자신을 돌아보고, 판타지에서 위안을 얻고,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개인적으로 판타지를 현실의 부조리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 잠시나마 극복할 수 있는 통로로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넘어선 그 어디에도 속박 받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상이라는 것에 한계가 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현실세계를 질료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상상의 세계가 인간의 경험치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세계에 속박되지 않기에, 세계를 한 차원 이동시키는 추동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은 이런 나의 바람이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마스터베이션 행위에는 섹스의 상대가 부재한다. 그렇기에 상대가 곁에 있다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상상하며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거기에 음악과 와인 한잔은 분위기를 살리기에 좋은 도구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스터베이션이라는 제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들을 정성껏 만들어낸다. 이 도구를 왜 만드는가? 마스터베이션을 실제 상대가 있는 섹스라는 초현실의 세계로 점프시키기 위한 추진제이기 때문이다. 이 때, 도구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실제와 가상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는 그들의 세계가 실제이고, 현실은 질료에 불과한 가상일 수 있다. 이렇듯 실제와 가상이 모호해지면, 지금 내가 딛고 선 땅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가상의 세계를 실제화하고 거기로 빠져든다. NET로 간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처럼 말이다. 어느덧 삶과 죽음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의미 없던 사물들이 살아 움직인다. 아니다 과연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움직이고 숨쉰다는 것이 살아있음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정지해 있는 의자를 살아있다 할 수 있다. 그에게 영혼이 있다면 말이다. 애니메이션은 정지해 있는 사물에 영혼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애니메이션은 현실의 세계 외에 다른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는, 또는 현실의 세계가 진짜 현실이지 의심케 함으로써 엄청난 패러다임의 역전을 초래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은 초현실주의가 상상하는 세계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매체로 보인다. 한편 이 영화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또 다른 점은 과연 감독은 변태성욕의 판타지적 구현을 왜 표현하려 하는가? 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라는 다른 체제로 넘어간 체코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자본주의로의 체제전환과정에서 혼란과 병폐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나운서 부인을 두고 도구를 이용해 자위를 하는 남자, TV 속의 아나운서에게 성욕을 느끼는 남자. 남편에게서 외면당하고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물고기(정자를 상징하는 빵을 먹은)의 애무를 즐기는 아나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감추고 닭이 되어 여자인형을 괴롭히는 남자, 밀짚을 모아 만든 인형을 때리며 즐거워하는 여자 등, 인간과 인간 사이의 중요한 소통이라 할 수 있는 섹스가 왜곡되고 있다. 이는 인간 사이의 모든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억압받고, 비인간화되는 과정의 표현이다. 소통의 부재와 불만족은 소외를 낳고 인간은 자기 안에 갇혀 자기만의 소통방식을 만들어 가는데, 그것이 병적인 변태성욕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아이러니하다. 인간의 소외와 소통불능으로 인한 욕구불만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니 말이다. 현실에서 힘들어 보이는 소통도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는 자유자재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부적응과 소통의 부재를 심화시켰을까?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자본주의는 자본이 유통되고 자본에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사회이다. 자본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고, 친구 간의 우정이 깨지고, 한 사람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척도가 된다. 인간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비인간화된다. 인간 위에 자본이 들어선 것이다. 각 개인마다 노동의 가치가 다르고, 살기 위해 거대한 공장의 부품처럼 일한다. 이렇듯 인간 사이에 자본의 유통은 존재해도 마음과 마음의 소통은 부재하므로 자연 인간 소외현상이 일어난다. 타인을 대할 때 진심이란 어디까지 통할 수 있고, 자신의 이득은 어디까지 계산해봐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가슴이 아닌 머리로 살아가면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줄어든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며 소통의 통로인 섹스에도 소외와 허무가 들어선다. 그래서 도구를 이용해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이성에 대한 성욕을 만족시키지 못해 상대방을 살해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난다. 이러한 소외와 대안적 욕구충족의 병폐는 자본이 유통되듯이 마약처럼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전파된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닌 일시적인 욕구충족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리고 다시 목마르면 다시 시도하고 새로운 방법들을 개발하고 찾는다. 그러므로 감독은 사회라는 해체할 수 없는 시스템 하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인간 욕구의 억압에 대항한 영화의 해방구로서의 역할, 그리고 자본주의 하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인간소외와 욕구불만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어떤 방식으로 욕구 충족을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닭 머리를 쓰고 날아다니던 남자는 옆집 부인을 형상화한  인형을 죽이고, 닭 머리를 태운다. 옆집 부인은 자신이 쾌락을 즐기던 도구인 밀짚 인형을 호흡을 못 하게 하여 죽인다. 물질만능 사회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욕구의 불만과 충족 과정은 더욱 새롭고 더욱 강력한 아이디어 상품들을 원한다. 자본이 가져다주는 풍족 뒤의 소외로 인해 인간은 계속 무언가를 만들고 부순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 외에도 다양한 인간의 욕망의 진화와 욕심에 맞춰, 그리고 자본의 획득을 위해 끊임없이 인간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상품들을 창조해낸다. 매일같이 새로운 첨단제품과 서적들이 쏟아져 나온다. 영화도 인간의 욕구에 의한 창조물이라는 점에서 이런 냉소적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양화 시대에 인간의 가치관은 개인화되고 혼돈에 빠진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걸 찾는다. 어쩌면 영화도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더 이상 새롭고 효율적이지 못하다면 사장될 수 있다. 영화도 자본에 의해 제작되고 인간을 자극해 자본을 만들어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산업으로서의 영화를 말함이다. 인간의 응어리를 풀어내고 표현하고픈 욕구는 영원할 것으로 보이기에 영화보다 자극이 강력하고 세련된 도구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전성기를 누리고, 그 새로운 도구가 발견돼 상용화되면 현재의 문학과 미술처럼 애용 인구가 줄어들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 화두라 할 수 있는 성욕에서 다양한 형태들이 등장하듯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즐겁게 하고 풍부히 하는 예술에서도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 다양한 매체들이 등장했다. 영화로 돌아와서 영화 속 인물은 3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이다. 이들은 한 동네에서 서로 깊은 연관을 갖지 않지만, 잠깐씩 마주치고 그때마다 눈으로 무언가를 소통한다. 이는 같은 공간에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사회변화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낯선 상대방에 아는 바가 없어도 그도 같은 사회권과 문화권에 사는 인간이며 공통적으로 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을 지켜보는 관객들도 결말에 가지 않고서도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행위의 단편을 보면서 짐작한다. 그리고 기대한다. 관객이 예상했던 결말과 같을지, 다를지, 같다면 어떤 식으로 새롭게 자신들을 만족시킬지, 미스터리 영화를 관객이 긴장을 끈을 놓치지 않고 보듯이 이 영화에는 미스터리적 구성이 보인다. 인물들이 무엇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인물들 간에 관계는 어떠한 지 제시하지 않은 채, 인물들 간 교차편집으로 행동의 단편들을 퍼즐 식으로 쌓아간다. 관객은 이들을 지켜보면서 퍼즐을 맞추듯이 그들을 관찰하고 심리를 추적하며, 결말을 예상한다. 그렇다고 구성이 복잡한 것은 아니다. 그저 6명의 일상을 조금씩 순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관객은 그들의 행동을 예상하고 기대한다. 특이하게도 6명의 인물은 인간으로서 소통하지 않고 도구로서 소통한다. 이러한 직정소통 방식이 아닌 간접소통 방식은 잡지 가게 주인이 TV 속 아나운서와 가상의 섹스를 하는 장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처음에 가게 주인은 TV에 붙인 기계 팔을 아나운서의 팔로 상상하고 애무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TV 속 아나운서도 남자의 자극이 통했는지, 반응하기 시작한다. 순간 정말 남자의 자극이 TV의 전파를 타고 들어가 여자와 통했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아나운서를 보여주면 아나운서는 피학성 애무를 즐기는 형사 남편의 부인으로 물고기의 애무를 받고 있다. 인간과 인간이 통한 것 같지만, 실은 각자 도구를 이용해 가상의 소통을 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소통을 원하면서도 소통하길 두려워하는 인간의 단면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안타까움이다. 결국 애니메이션이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도 소통의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다. 인간은 갈수록 인간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기보다 매체를 통해 소통한다. 영화와 음악, 문학, TV 뉴스, 신문, 스포츠, 게임, 노래방, 술을 공유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에 열광한다. 스타 크래프트라는 게임에 빠져 그것에 대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얘기할 수 있어도 정작 그 이야기가 끝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어떤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길 즐겨도 정작 본인과 상대방에 관해 이야기하길 조심스러워한다. 영화를 좋아하고 업으로 삼겠다는 나 자신도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땐 동질감을 느껴도, 나라는 사람이 누군지 이야기하지 못하고, 상대가 누군지 듣지 못한다. 매체라는 유희의 도구에 지배되는 인간의 모습은 점차 파편화된다. 나 자신의 총체적인 모습이 아닌 매체에 의해 단편적인 인상이 지어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재밌는 판타지를 관객에게 보여주지만, 그들의 정서와 영혼은 황폐해 보인다. 또한 그들의 모습에서 나 스스로도 용기 없고, 메말라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주는 인상은 아이러니하다.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상상이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과연 인간은 진정 소통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의문이 든다. 개인적 견해로 이런 절망에 대한 희망을 도구가 들어가지 않는 태초의 섹스에서 찾고 싶다. 섹스에는 육체와 육체의 부딪힘과 느낌과 감정의 소통이 있다. 소통 없고 사랑 없는 섹스도 있으나, 현존하는 인간과 인간의 가장 밀접한 언어라 생각된다. 매체와 도구를 통하지 않고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길 바란다. 인간의 욕망은 자본과 기술에 의해 다양하게 개발 조작되고 있고, 이를 통해 다양한 소통불능과 병폐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본다. <쾌락의 공범자들>을 보면서 쾌락의 공범자가 아닌 소통의 공범자가 되길 희망해본다. 세상의 무수한 쾌락을 공유하기 이전에 인간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찾길 희망해본다. 나 스스로 반성한다. 영화의 공범자들을 찾기 이전에 내 자신을 열어놓고 소통할 준비를 하겠다. 이 글을 써가면서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나의 메마름을 인식했다. 그동안 부모형제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누군가에게 부족했던 관심과 애정, 할머니께서 언제나 말씀해주셔 지겹게 느껴지던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말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원하는 나는 영화인이기 전에 한 인간이다. 영화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보여주고 소통하길 업으로 삼길 희망하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인간의 소통을 방해하지 않길 바란다. <쾌락의 공범자들>은 나에게 이렇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믹스가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에 영화적으로 감탄했지만, 근본적으로 영화라는 매체와 나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그리고 글쓰기는 사유의 폭을 좀 더 넓히고 돌아보게 해주기에 고마운 행위라는 생각도 든다.


(총 0명 참여)
thesmall
글쿤요   
2010-03-14 21:42
glamstar
?   
2008-02-06 04: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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